항목 ID | GC042004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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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渭東 |
영어음역 | Mun Wido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봉림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서용태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사항]
문위동(文渭東)[1903~1976]은 1903년 3월 23일에 김해군 가락면 봉림리[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봉림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진주공립농업학교[구 진주농업학교, 현 경남과학기술대학교]에 진학하였다. 때마침 3·1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부산·경상남도 지역에서도 만세 운동이 잇따라 일어났다. 1919년 4월 13일 오후 문위동은 봉림 마을의 음지 바위 아래에서 사촌 문위호(文渭鎬)·윤상기(尹相基)·변동윤(卞東允) 등 20세 전후의 청년 여러 명을 모아 만세 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오호라! 창천! 대한 독립 만세”를 연달아 부르짖었다. 학부형들의 만류로 해산하여 일본 관헌과 충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3·1 운동의 경험은 문위동의 민족의식을 자극하며 큰 영향을 미쳤다.
문위동은 1920년 진주공립농업학교 2학년에 재학 중에 기숙사 학생 48명으로 구성된 토론연구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같은 학교의 동급생인 경상남도 사천군 읍남면 출신의 신영안(申英按), 양산군 동면 출신의 김익상(金益祥) 등과 모의하여 1920년 8월 30일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이용하여 만세 시위를 크게 벌이려고 계획하였다. 이들은 8월 30일 오후 9시경에 진주 공원, 진주공립농업학교 앞, 재판소 앞 등 세 곳에서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치고 독립가를 부르면서 거리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문위동 등은 같은 학급의 박학두와 의논하여 8월 28일 아침에 진주공립농업학교 기숙사에서 ‘선언서’라고 제목을 붙인 문서를 만들어 기숙사 학생 전부가 돌려 본 후, 학교의 등사판으로 300장을 인쇄하였다. 이들은 8월 29일 밤 학생 강연회를 열고 제1호와 제2호 교실에 모여서 천장절 날에 할 일을 의논하였으며 진주제1보통학교, 진주제2보통학교, 광림학교, 진주기독청년회, 진주천도교청년회, 진주청년친목회 등 진주 내 여러 곳에 통지하여 동지를 모았다.
그러나 시위 계획이 진주경찰서에 발각되었으며, 거사 당일인 30일 오후에 진주경찰서장 히라노[平野]가 직접 출동하여 만세 시위를 모의한 학생 72명을 모두 검거하였다. 이에 따라 경상남도청도 태극기 2벌, 손기 47장, 격문 100장 등을 압수하였다. 검거된 학생은 진주공립농업학교 학생 55명, 진주제1보통학교 학생 3명, 진주제2보통학교 학생 1명, 광림학교 학생 1명, 기타 12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주동자 15명은 검사국으로 이송되었고 나머지 57명은 방면되었다.
문위동은 진주공립농업학교 독립 만세 시위운동 사건으로 1920년 10월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고 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진주공립농업학교에서 퇴학을 당하였다. 문위동은 수감 생활을 마친 후 녹산의 강성의숙(降星義塾)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해방 이후에는 김해읍장과 3·1동지회 김해 지부장을 지냈다. 진주농업학교는 해방 이후 문위동의 항일 정신을 기려 졸업장을 수여하였다. 문위동은 1976년 5월 1일에 사망하였다.
[묘소]
묘소는 고향인 부산광역시 강서구 봉림동에 있으며 차남인 문성술이 관리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1983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