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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포 초량 화관 대회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356
한자 釜山浦草梁和館大繪圖
영어의미역 Picture of Choryang Hwagwan in Busan-po
이칭/별칭 「조선국 초량 화관 대회도」,「초량 화관 대회도」,「초량 화관도」,「초량 왜관도」
분야 지리/인문 지리,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서화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동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회화
작가 일본 내각 임시 수사국
소유자 동경대학 사료 편찬소
관리자 동경대학 사료 편찬소
제작 시기/일시 1886년 3월연표보기 - 제작
현 소장처 동경대학 사료 편찬소 - 일본 동경도(東京都) 문경구(文京區) 본향(本鄕) 7-3-1

[정의]

1886년 3월에 일본 내각 임시수사국이 일본 육군성에 소장된 「초량 왜관도」를 빌려와서 그린 그림.

[개설]

18세기 중엽 이후 일본에서 그린 왜관도를 1820년에 고웅직응이 증보하여 새롭게 그렸다. 그것을 토대로 1829년에 수정한 뒤 육군성에서 소장하였다. 이 육군성 소장본을 1886년 3월 수사국이 빌려서 다시 그린 것이 「부산포 초량 화관 대회도(釜山浦草梁和館大繪圖)」이다. 1872년 태정관(太政官) 정원(正院) 밑에 설치된 역사과(歷史課)는 1875년에 태정관 수사국이 되었다가, 1885년에 ‘내각 임시수사국’으로 개칭되었다. 왜관도에 찍힌 수사국 도장은 내각 임시수사국 도장이다. 이 수사국 소장 왜관도가 그 이후 동경대학 사료편찬소로 이관되어 현재까지 보관되고 있다.

[형태 및 구성]

「부산포 초량 화관 대회도」의 크기는 세로 78.4㎝, 가로 50.0㎝이다. 종이에 스케치 형식으로 그린 초량 왜관 전경 그림이다. 초량 왜관 자체만 그린 것이고, 왜관 밖의 조선 측 건물은 모두 생략되었다. 왜관 중앙에 용두산을 따로 그린 작은 종이가 붙어 있다. 용두산을 중심으로 아래쪽 중앙에 관수가를 비롯한 동관이, 위쪽에 서관이 그려져 있다. 왜관 내부에 건물 구조를 간략하게 그리고, 전역에 소나무를 스케치 형식으로 그렸다.

좌측 하단에는 목도(牧島)[지금의 영도]가 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용두산 서쪽에는 신사 입구에 서 있는 조거(鳥居)가 3곳 그려져 있다. 초량 왜관 돌담장 주변에 선을 긋고, 담장 길이 등을 상세하게 표기하였다. 우측 하단에는 ‘조선국초량화관대회도(朝鮮國草梁和館大繪圖)’라는 그림 이름이 적혀 있다. 그 옆에는 “문정(文政) 3년[경진, 1820] 정월에 고웅직응(高雄直應)이 증보한 대회도(大繪圖)로, 정령(正令)이 관(館)[왜관]에 있을 때인 문정 12년[기축, 1829] 8월 23일에 그린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우측 상단에는 붉은 글씨로 “명치 19년(1886) 3월에 육군성 소장 왜관도를 빌려서 그렸다”는 주기(註記)와 ‘수사국(修史局)’이라는 붉은색의 네모난 도장이 찍혀 있다.

[특징]

「부산포 초량 화관 대회도」는 1876년 개항으로 초량 왜관이 폐쇄되고, 일본인 전관 거류지가 설치된 이후에 제작된 초량 왜관 그림이다. 그림은 고교장지조(高橋章之助)의 『종가와 조선(宗家と朝鮮)』에 수록된 「초량 왜관도(草梁倭館圖)」나 「초량 왜관 회도(草梁倭館繪圖)」[『부산의 고지도』, 230~231쪽 수록]와 비슷하다. 이 두 왜관도를 합친 느낌을 준다. 전자는 ‘연보(延寶) 6년(1678) 7월 부산 화관(釜山和舘) 준공도’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건물 설명 가운데 1742년 대마도에서 조직된 조선어 통사의 ‘오인통사옥(五人通詞屋)’이 있으므로, 18세기 중엽 이후에 작성된 왜관도이다.

[의의와 평가]

「부산포 초량 화관 대회도」는 일본 측에서 그린 「초량 왜관도」의 작성, 증보, 보관 등 경로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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