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3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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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永瑞 |
영어음역 | Gim Yeongseo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255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양미숙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영서(金永瑞)[1880~1975]는 1880년 11월 23일에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255번지에서 태어났다. 김영서는 1919년 대구의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중에 3·1 운동의 소식을 듣고 이만집·김태련·권의윤·이상백·백남채·정재순(鄭在淳)·정광순(鄭光淳)·최상원(崔相元)·최경학(崔敬學) 등과 함께 만세 시위를 결의하였다. 이들은 대구 서문 장날인 1919년 3월 8일 오후 3시를 기하여 독립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하였으며, 김영서는 계성중학교 학생들의 동원을 담당하였다. 3월 6일 이갑성이 이만집에게 보낸 독립 선언서를 전해 받은 김태련이 집에서 이를 등사하고, ‘대한독립기’라고 쓴 큰 기와 크고 작은 태극기 40여 매를 만드는 등 사전 준비를 하였다.
1919년 3월 8일 아침 일찍부터 대구 도청 정문 등의 주요 지점에 태극기와 격문이 살포되었다. 오후 3시경에 김영서는 주동자들과 함께 독립 선언식을 거행하였고, 1,0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 군중의 선두에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면서 일본 경찰과 기마대의 제지를 물리치며 시가지를 행진하였다. 김영서가 시위 군중과 함께 제지선을 뚫고 중앙파출소를 거쳐, 달성군청(達城郡廳) 앞 삼각지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 80연대는 6대의 기관총으로 무장하여 시위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행진을 멈춘 시위 대열 사이로 일본군 헌병과 경찰이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구타하며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김영서도 이때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2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75년 12월 13일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