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1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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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曺命采 |
영어음역 | Jo Myeongchae |
이칭/별칭 | 주경(疇卿),난재(蘭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구지현 |
[정의]
조선 후기 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문신.
[가계]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주경(疇卿), 호는 난재(蘭齋). 증조할아버지는 조한영(曺漢英)이고, 할아버지는 조헌주(曺憲周)이며, 아버지는 의흥 현감 조하성(曺夏盛)이다. 어머니는 윤반(尹攀)의 딸이다.
[활동 사항]
조명채(曺命采)[1700~1764]는 1736년(영조 12)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홍문관 수찬, 홍문관 교리 등을 지냈다. 1747년(영조 23) 통신사 종사관에 뽑혀 이듬해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와 『봉사일본시문견록(奉使日本時聞見錄)』을 썼다. 『봉사일본시문견록』에 따르면 통신사 일행은 1748년(영조 24) 2월 12일 부산에서 출항하여 윤 7월 13일 돌아왔다. 이후 조명채는 승지, 사간원 대사간, 황해도 관찰사, 이조 참의,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 예조 참판을 거쳤다.
1755년(영조 31) 예조 참판으로 북도(北道)에 거주하는 향화인(向化人)들의 성관(姓貫)을 조사하는 임무를 맡았다. 1762년(영조 38) 사도 세자(思悼世子) 사망 사건 때 옥사와 관련하여 국문을 당하였으나 곧 사면되어 이듬해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1768년(영조 44) 조명채가 죽자 영조(英祖)는 통신사행의 노고를 생각하여 조명채의 아들이 국록(國祿)을 받도록 조처하였다.
[학문과 저술]
1748년(영조 24) 통신사 종사관으로서 부산을 출발하여 에도[江戶]를 방문하고 부산으로 돌아올 때까지의 일기와 견문을 적은 『봉사일본시문견록』을 남겼다.
[묘소]
조명채의 묘는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무촌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