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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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弘重 |
영어음역 | Gang Hongjung |
이칭/별칭 | 임보(任甫),도촌(道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구지현 |
[정의]
조선 후기 회답 겸 쇄환사 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문신.
[가계]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임보(任甫), 호는 도촌(道村). 아버지는 승지를 역임한 강정(姜綎)이다.
[활동 사항]
강홍중(姜弘重)[1577~1642]은 1606년(선조 39)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광해군 때 주서(注書), 세자시강원 정언·세자시강원 문학 등을 거쳐 장령, 필선을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직후 문사낭청(問事郞廳)에 임명되어 대북파의 죄를 심문하였다. 1624년(인조 2) 회답 겸 쇄환사 부사로 일본에 건너가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 공으로 통정대부로 승진하였고, 이어 군자감 정이 되었다. 강홍중은 조정에 건의하여 일본에서 데려온 백성 가운데 화포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을 뽑아 그 기술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1635년(인조 13)에는 명나라 도독의 협판사가 되어 명의 사정과 후금의 움직임을 살펴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후 청송 부사(靑松府使)·동지의금부사·성천 부사(成川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강홍중이 쓴 『동사록(東槎錄)』에 따르면 조선 통신사 일행은 1624년(인조 2) 9월 16일 동래부에 내려가 9월 28일 영가대(永嘉臺)에서 해신제를 지낸 뒤 일본으로 출발하였고, 1625년(인조 3) 3월 5일 부산포에 도착하였다. 이때 동래 부사(東萊府使) 김치(金緻)를 포함하여 관원들과 교유하였다.
[학문과 저술]
1624년과 1625년에 걸쳐 회답 겸 쇄환사 부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쓴 『동사록』이 전한다.
[묘소]
강홍중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70년(현종 11) 정두경(鄭斗卿)이 글을 짓고 이정영(李正英)이 글씨를 써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는 현재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상갈로 6 경기도박물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