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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085
한자 孫文彧
영어음역 Son Munuk
이칭/별칭 이문욱(李文彧),손요인(孫要寅)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손승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무신|전쟁 포로
성별
본관 경주
대표관직 첨사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왜군에 잡혀감
활동 시기/일시 1597년 - 귀순
활동 시기/일시 1604년 6월 - 사명 대사와 탐적사로 일본에 다녀옴
활동 시기/일시 1610년 11월 - 대마도 사신 접견
활동 시기/일시 1617년 11월 - 광해군 폐비 문제 거론
묘소|단소 손문욱 묘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424

[정의]

왜의 포로 출신으로, 임진왜란 직후 조선과 일본의 국교 재개에 활약한 무신.

[가계]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가계는 알 수 없다고 적혀 있으나 『경주손씨 세보(慶州孫氏世譜)』[권1, 26쪽]에 따르면 손문욱(孫文彧)은 손경원(孫敬源)의 11세손으로, 생전의 이름은 손요인(孫要寅)이다. 무과에 급제했으며, 행흥양 현감, 순천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지내고, 전쟁 중에 죽은 것[戰亡]으로 되어 있으나 확인할 수 없다.

[활동 사항]

『선조실록』 초반에는 손문욱이라는 이름은 없고 이문욱(李文彧)으로 나온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이문욱은 임진년에 포로로 잡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양아들이 되었다. 전쟁에서 공을 세워 총애를 받았으나 도요토미 희데요시의 첩과 간통을 하여 쫓겨났다. 그 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장이 되어 남해 현감이 되었다고 한다.

1597년(선조 30) 6월 조선에 귀순하여 이순신(李舜臣)의 부하가 되었다. 이듬해 11월 2일 이순신의 명령으로 명나라 제독인 진린(陳璘)의 진영에 들어가 순천왜성을 공략할 계책을 논의했다고 하는데, 『선조실록』에는 이때부터 비로소 손문욱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손문욱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할 때 옆을 지켰고, 뒤이어 조선군을 지휘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공로를 인정받아 첨사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1604년(선조 37) 6월, 사명 대사(四溟大師)와 함께 탐적사(耽謫使)에 임명되어 일본에 다녀오는 등 전쟁 후 두 나라가 강화 회담을 맺고 국교를 재개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1610년(광해군 2) 11월에는 쓰시마[對馬島] 사신 다치바나 도모마사[橘智正]을 영접하기 위해 박대근과 함께 부산에 파견되었다. 그 후의 행적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1617년(광해군 9) 11월 광해군(光海君)의 폐비 문제를 거론하기도 하였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다.

[묘소]

『경주손씨 세보』에는 손문욱의 묘가 경기도 고양시 신도면 지장리 마월산 곤좌[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424번지]에 있다고 되어 있으나 확인된 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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