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4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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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映畵 |
영어의미역 | Cinema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병학 |
[정의]
부산에서 상영되는 영화 또는 영화관.
[개설]
부산 근대 영화의 기원은 개항 후 대중문화 공간으로 탄생되는 극장의 등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 부산의 극장에서는 신문화와 함께 들어온 활동사진이 상영되었고, 상설 영화관 시대와 발성 영화관 시대를 거치며 무성 영화와 유성 영화가 상영되었다. 부산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극장 문화가 시작되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22개의 극장이 있었을 정도로 극장 문화가 꽃을 피운 곳이었다. 이렇게 일본 식민지로부터 광복을 맞기까지 부산의 극장 문화는 대중문화를 이끌어 온 하나의 축이었다.
하지만 극장 문화의 침체와 함께 영화 관련 사료는 모두 유실되어 버렸고, 부산의 근대 영화는 오랜 기간 잊힌 채 숙면기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우리 근대사의 아픔과 수레바퀴처럼 맞물려 비켜 갈 수 없었던 과정이었다. 그러나 1996년에 개최된 부산 국제 영화제[BIFF]를 시작으로 부산은 영화의 도시로 거듭나게 되었다.
[근대 부산의 영화]
1. 1900~1910년대
부산의 영화를 시대별로 일괄해 본다면, 1903~1919년을 첫 시기로 잡아, 1895년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최초로 활동사진이 공개된 후, 1901년 부산에 전등 회사가 설립되고 이어 우리나라 처음으로 『황성 신문』에 영화 상영 광고가 나올 무렵 1903년 부산에서 한국 최초의 영화관 행좌(幸座)가 개관되었다.
행좌는 부산부 남빈정[현재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이음 1길 35 할매 회국수 건물 부지]에 세워진 부산 최초의 극장[1903∼1915]으로 1915년 행관(幸館)으로 신축되어 부산 영화 상영관의 효시가 된 곳이다. 같은 해에 송정좌(松井座), 1907년 부산좌(釜山座)가 개관되고 1914년 욱관(旭館)이 활동사진 전용관[영화관]으로 출발하였고 보래관[후일 문화 극장]과 행관, 1916년 상생관(相生館)[후일 시민관] 등이 그 뒤를 따랐다. 이때부터 영화관이 부산 영화 문화의 선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916년 미국 영화 「명금」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자 서구의 화제작들이 계속 소개되었고 특히 찰리 채플린의 초기 희극 영화들은 감동과 더불어 장차 부산의 영화 감상 문화의 토양이 된다. 1916년에는 미국인 밀렛트가 당시의 부산과 경성의 풍경을 촬영한 기록 영화를 미국에서 상영한 후 부산에서 먼저 공개하였다. 이러한 것이 바탕이 되어 한국 영화는 1919년 「의리적 구토」라는 연쇄극의 탄생을 보게 된다.
2. 1920년대
1924년 부산에서 국내 최초의 영화사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설립되었는데, 이 영화사는 당시 부산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던 가토오[加藤], 다사카[高佐], 와타나베[渡邊], 나데[名出] 등의 일본인이 20만 원의 자본금을 공동 출자하여 주식회사 형태로 영화사를 설립해 2년 정도 유지되었으며 한국 영화계의 선구자이자 항일독립 투사로 36년의 짧은 생을 살다간 춘사(春史) 나운규(羅雲奎)를 비롯해 안종화(安鍾和), 이경손(李慶孫), 이월화, 이채전 등 초기 영화인 배출의 산실이었다.「해의 비곡」,「운영전」,「암광」,「촌의 영웅」등 4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1925년 해산되었다. 일본인에 의해 설립된 영화사였지만 한국 영화의 태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같은 해 부산에 사꾸라바상회라는 영화 배급사가 설립되어 조선과 만주까지 외국 영화 배급 업무를 시작하였고 1925년 경상남도 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전해 올 무렵, 부산에는 국제관(國際館)을 시작으로 수좌(壽座), 태평관, 유락관(遊樂館) 등의 영화관이 늘어나면서 유명 회화들과 더불어 영화 감상 분위기가 더욱 성숙되어 갔다. 그 후 1929년 토키 영화[talkie, talking picture: 유성 영화]가 우리나라 최초로 부산의 행관에서 상영되었으며 부산 출생의 서월영(徐月影)이 영화배우로 활약하였다.
3. 1930년대
1931년 부산에 자생적으로 영화 동인회가 창립되어 민족 자본에 의한 최초의 극영화 제작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태평관 대표 김해득, 이주일 등이 「뜻 깊은 도적놈」, 「그 여자의 설움」 등의 영화를 만들었다. 다음 해에 영광키네마가 첫 작품으로 「남해의 선풍」을 준비한 기록이 있어 그 무렵 부산에 영화 제작 분위기가 상당히 조성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30년에는 소화관(昭和館)[후일 동아 극장]과 1934년 부산 극장이 차례로 개관, 남포동 극장가를 형성하면서 지금의 BIFF 광장의 모태가 되었다. 1938년 보래관이 재건축되어 부산은 일찍이 제작, 배급, 흥행의 조건을 두루 갖춘 시대를 맞이하였다. 1935년 부산 출신의 양세웅(梁世雄)이 일본에서 촬영 기술을 배워와 극영화 「춘풍」을 제작하면서 스스로 촬영 기사로도 데뷔하였다는 것은 선각자적인 자랑이라 할 수 있다.
[현대 부산의 영화]
1. 1940년대
1945년 조국 광복 이전에는 부산도 일제의 전쟁 야욕으로 문화, 예술의 자유로운 향유를 생각할 수 없었다. 따라서 광복을 맞자 영화관 관계자들이 먼저 현상금을 걸고 일본식 영화관명을 개명하였다. 예를 들어 상생관이 공모를 통하여 대중 극장으로 개칭하였다. 1946년에는 최인규 감독의 「자유 만세」의 시사회가 열려 일찍부터 부산에서도 영화 개봉 전에 사전 평가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무렵 부산에도 미국문화원[당시 USIS]이 생겨 미국의 우수 영화들을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2. 1950년대
1950년대에는 6·25 전쟁으로 말미암아 서울의 영화인들이 임시 수도 부산을 근거지로 영화의 명맥을 잇던 시기였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가 1950년 부산에서 발족을 보았고, 전화 속에서도 1952년 부산 문화 예술계의 한형석(韓亨錫), 우신출(禹新出) 등의 주도로 만든 「낙동강」을 비롯하여 수편의 극영화가 부산에서 만들어졌으며 한국 최초의 여류 감독 박남옥이 「미망인」으로 데뷔하였다.
1958년에는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전포동에 부산 영화 촬영소가 세워지고 1959년에는 부일영화사가 영화를 제작하였으며 극장가에는 1955년 현대 극장을 시작으로 국제 극장, 제일 극장 등이 대형 영화관 시대를 열었다. 1958년에는 부산일보사가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상(映畫賞)인 금용상 다음으로 부일 영화상을 제정, 한국 영화의 부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부산영화평론가협회가 본격적인 활동을 보이자 이를 구심점으로 영화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확산되어 부산에 예술 연구회, 영화 동호회, 영화 감상회, 부산대학교 영화연구회 등의 모임이 생겨났다.
3. 1960년대
1960년대는 한해 200편 전후의 영화가 제작되던 시대였다. 특히 영화 제작 자본 형성에 어려움이 따르자 부산의 개봉관과 지역 영화업자들이 제작비 지원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호황기에 때맞춰 동명 극장, 태화 극장, 부영 극장, 국도 극장의 대형 영화관이 문을 열었으며, 부산시극장협회가 결성된 것도 이 무렵이다. 또한 부산이 로케이션 촬영의 적지로 알려지면서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와 김수용 감독의 「갯마을」을 비롯하여 「순교자」 등의 화제작이 줄을 이어 부산을 찾았다.
4. 1970년대
1970년대에는 세계 영화계 추세의 여파로 한국 영화도 불황기를 맞았다. 그런 가운데 부산 출신의 하길종(河吉鐘)[1941~1979] 감독이 미국 유학에서 귀국하여, 한국 영화계의 체질 개선을 위한 새 시대를 여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부일 영화상이 1973년 제16회로 막을 내렸으나 다행히 1976년 부산 개항 100주년을 기념하여 국제 규모의 행사로는 처음으로 제22회 아시아 영화제가 부산에서 개최되었다. 1978년 한국 영화의 재도약을 위하여 『주간 국제』가 주최한 전국 신인 남녀 영화배우 선발 대회에는 유현목 등 유명 영화인들이 심사 위원으로 대거 참석하였다. 이를 계기로 현진영화사 부산출장소가 개설되어 부산을 무대로 임권택 감독의 「내일 또 내일」을 제작하였다.
이외에도 부산대학교 교수 장갑상(張甲相)이 처음으로 영화 평문집 『영화와 비평』을 출간하였고, 요산 김정한의 소설 「인간 단지」가 지역 출신 시나리오 여수중의 각색으로 영화화되었으며, 여류 시나리오 작가 나소원이 「봄봄」으로 청룡상 각본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는 8㎜ 소형 영화의 전성시대였으며, 이런 경향은 부산의 아마추어 영화 동호인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것으로 부산 영화 문화의 다양한 특징을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다.
5. 1980년대
1980년대는 한국 영화가 유명 해외 영화제 등에서 수상하는가 하면 영화계도 기사회생의 조짐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미국 직배 영화의 상륙으로 또 혼돈에 빠져들었다. 이러는 가운데 부산의 영화 문화는 활로를 모색하였다. 부산도 예외가 아니어서 필름 수급 재편의 움직임과 더불어 소극장 시대[1982~1999]가 열렸다. 1982년 옛 동아 극장 자리 2층에 지난날의 명성을 되찾는다는 의미로 극장명도 그대로 160석의 동아 극장이 들어섰다. 그 후 1983년에 푸른 극장 외 5개, 1984년 동남 극장, 1985년 금성 극장 등 다양한 소극장이 세워졌다.
또한 한국영화협회 부산지회가 지방에서는 최초로 부산 단편 영화제[현 부산 아시아 단편 영화제]를 개최하여 젊은 영화인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고, 1983년 부산산업대학[현 경성대학교]에 연극영화과가 신설되어 영화 인재 양성의 요람이 되었다. 또 부산 출신의 두 신인 감독 김송원, 지청언이 각각 개인 프로덕션을 개설하여 「서울 흐림 한때 비」와 「천사 늪에 잠들다」를 제작하여 발표하였다.
지역 작가 이윤택은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로 대종상 각본상을 수상하였다. 특히 비상업권 문화 공간인 프랑스문화원과 가톨릭 센터를 중심으로 한 ‘좋은 영화 보기 운동’이 영화 예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새롭게 환기시켰다. 또한 부산 출신의 박광수, 하명중 감독이 작가주의를 표방하여 영화계에 주목을 받았다.
6. 1990년대
1990년대는 부산 영화 문화의 화려한 개화기였다. 1996년 부산 국제 영화제가 국내외의 관심 속에 출범, 최단 기간 내에 아시아권 최고의 영화제로 정착하였기 때문이다. 남포동 극장가가 BIFF 광장으로 명명되고 여기에 세계의 유명 영화인들의 핸드 프린팅이 부조되는 등 부산 국제 영화제로 말미암아 부산은 영화의 도시가 되었다.
또한 부산에서도 영화 제작의 열기가 뜨거워져 동녘을 비롯한 프로덕션이 생겨나 극영화, 단편 영화들을 제작하여 국내외의 주목을 이끌었고, 전수일·오석근·김진해·곽경택의 지역 출신 감독들이 큰 활약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젊은 영화인들이 중심이 되어 부산독립영화인협회가 결성되었고, 스크린 쿼터 사수를 위한 부산 영화인 궐기 대회도 있었다.
극장가에서는 1993년 부산 극장이 지역 복합 영화관 시대를 선도하였고 대영 시네마가 그 뒤를 따랐다. 복합 영화관 시대는 다용도 문화 공간으로, 멀티 플랙스 시대를 가리킨다. 멀티 플랙스는 자유로운 프로그램 선택권의 기회 제공과 관객들의 소비 욕구를 한 건물 안에서 함께 충족시켜 주는 선진화된 영화 감상 문화 공간이다.
한편으로 부산 영화의 공간이 남포동에서 서면, 해운대로 바뀌었다. 이는 1996년 부산 국제 영화제 개막과 시기를 같이 하고 있다. 이곳에 영화 관련 단체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1999년 미래 영화 인재의 산실이 될 부산, 영화 제작에서 상영에 이르는 모든 업무를 관장하는 부산영상위원회가 들어섰다.
7. 2000년대
2000년대 이후 부산은 명실상부한 영화의 상징 도시가 되었다. 특히 영화 「친구」의 흥행으로 부산이 로케이션 촬영이 용이한 지역으로 각인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친구」에 등장하는 부산 지역에 대한 전국적인 관심은 부산의 관광을 이끌기도 하였다. 이후 2001년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도 한국 영화 사상 최대의 교통 통제가 이루어졌던 촬영이었다.
부산영상위원회의 통계에 의하면 2000년 10편의 영화가 부산 로케이션을 시작한 이후, 2001년에 13편, 2002년에 19편, 2003년에 24편, 2004년에 18편, 2005년에 30편, 2006년에 43편, 2007년에 43편이었다. 2008년에 28편으로 약간 줄기는 하였지만, 2009년에 부산에서 촬영한 장편 영화는 모두 30편으로 제작된 전체 국내 장편 영화의 40%를 넘어섰다. 이런 경향은 2010년, 2011년에도 계속 이어졌다.
이는 새롭게 만들어진 부산영상위원회의 적극적인 노력과 부산광역시 및 부산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가 함께 상승 작용을 일으키면서 낳은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부산영상위원회는 로케이션 전담 팀을 꾸려서 3만여 장의 사진을 갖춘 온라인 DB의 구축, 요청을 받아 로케이션 장소를 물색하는 정보력, 도로 통제나 경찰 협조 등 촬영을 성사시키는 행정 지원 시스템을 갖추어 영화 찍기 좋은 로케이션 도시의 토대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부터 한국 영화의 중심부 역할을 하였던 부산은 6·25 전쟁을 기점으로 중앙에서 배제되어 주변화 되어 갔다. 부산과 영화의 관계는 1990년대 중반에 와서 새로워지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는 중앙 중심적 국가성이 약화되고 지역성이 강조되던 시기였다. 이는 각 지방 자치 단체들에 의해 추진된 문화·관광 산업을 통한 지역 경제 활성화 방안·도시 이미지 제고 방안 등 다소 성급한 움직임들에 잘 나타났다. 이러한 움직임에는 향토주의, 지역 이기주의, 거친 지역 개발주의 등 다소 부정적인 양상들도 있었으나 이러한 흐름은 이후 BIFF 개최에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1996년에 개최된 BIFF를 시작으로 해서 부산과 영화의 관계는 새롭게 열리게 된 것이다. ‘국제’와 ‘영화제’란 단어 앞에 ‘부산’이란 지역명이 놓이는 것은 불가능한 계획처럼 보였지만 세계화 담론과 함께 국제 영화제 개최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면서 BIFF는 현실화되어 세계화와 지역성의 탈경계적 지평이 열리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