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6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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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羅雲奎 |
영어음역 | Na Ungyu |
이칭/별칭 | 춘사(春史)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희진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에서 활동한 한국의 대표적인 영화인.
[활동 사항]
나운규(羅雲奎)[1902~1937]는 1902년 10월 27일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면에서 나형권의 3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회령공립보통학교와 신흥학교 고등과를 거쳐, 1921년 중동중학교 고등예비학과에서 공부하였다. 1919년 나운규는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던 3·1 운동에 참여하여, 4월 초순 회령 지역에서 독립 선언문 수 천 장을 교회 지하실에서 등사하여 배포하였다. 하지만 독립 선언문을 배포한 일이 일본 경찰에 포착되자 러시아로 피신하여, 한때 백군 멘셰비키 군대에 들어가 용병 생활을 하였다.
1920년에는 간도로 돌아와서 두만강 연안의 독립군 단체인 도판부(圖判部)에 가입하였다. 도판부는 한때 두만강을 건너 회령경찰서 수비대를 공격하기도 한 단체였다. 1921년 나운규는 철길 굴 폭파가 미수로 끝난 도판부 사건으로 회령경찰서 경찰에 검거되어, 보안법 및 제령 제7호 위반죄로 2년 동안 복역하였다. 이때 독립투사인 이춘식(李春植)으로부터 ‘춘사(春史)’라는 호를 받게 되었다. 그 후 나운규는 안종화(安鍾和)의 조언과 권유로 1924년 부산에 창설된 최초의 영화사인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연구생으로 입사하면서 부산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25년에는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두 번째 영화로, 윤백남이 연출한 「총희의 연」[일명 「운영전」]에서 여주인공을 가마에 태워가는 교군(較軍) 중 한 사람으로 출연하였다. 그러나 나운규의 부산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 같은 해에 윤백남이 조선키네마주식회사를 나와 서울에 백남프로덕션을 설립하면서 나운규 역시 윤백남과 함께 무대를 서울로 옮겼기 때문이다. 백남프로덕션의 첫 작품인 이경손(李慶孫) 감독의 영화 「심청전」에서 나운규는 비로소 비중 있는 배역을 맡게 되었다. 이 영화에서 나운규는 스물 네 살의 젊은 나이에 중년의 심봉사 역을 맡았을 만큼 이미 성격 배우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졌다.
이러한 나운규의 천부적인 재능은 1926년 원작·각색·감독·주연을 맡아 기량을 발휘한 영화 「아리랑」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아리랑」은 서울의 충무로에서 요도야[淀屋]라는 모자점을 경영하고 있던 일본인 요도 도라조[淀虎藏]가 설립한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이 두 번째로 제작한 영화였다. 유감스럽게도 그 필름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지는 않지만 「아리랑」의 명성만은 사그라지지 않은 채 하나의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검열과 자유스럽지 못한 사회 상황 때문에 비록 감독의 명의를 제작 실무 책임자인 일본인 스모리 히데카츠[津守秀一]로 내세우기는 하였지만, 당시의 보도와 뒤를 이은 증언들은 「아리랑」의 작품성과 흥행성, 그리고 나운규의 재능에 대해 한결같이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그때까지 한국 영화에서 느끼지 못하였던 특유의 표현 기법이 세인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나운규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다섯 편의 영화를 연출하고서, 1927년 나운규프로덕션으로 자립하였다. 1928년 나운규프로덕션에서 각본·감독·주연의 1인 3역을 맡아 만든 영화 「사랑을 찾아서」는 당초 제목이 「두만강을 건너서」였으나,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저 강을 건너서」에 이어 세 번이나 제목이 바뀌는 곡절을 겪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 나운규는 치솟는 인기로 자만하여 신변 관리를 소홀히 하고 무절제한 여성 편력으로 자신을 낭비하다가 심각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나운규의 말년은 폐결핵과의 싸움으로 이어졌다.
1937년 나운규는 병든 몸을 이끌고 혼신의 힘을 다해 촬영한 윤봉춘(尹逢春)·노재신(盧載信) 주연의 「오몽녀」[1937]를 유작으로 남기게 되었다. 「오몽녀」는 슬럼프에 빠져 쇠퇴의 길로 들어선 나운규의 말년을 반전시킬 수 있는 주목할 만한 가작이었다. 나운규는 1937년 8월 9일 오전 1시 25분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최초의 영화인장으로 성대히 거행되었다.
[저술 및 작품]
저술로는 러시아에서의 용병 체험에 대해 쓴 「나의 러시아 방랑기」[『문예 영화』창간호, 1928]가 있다. 영화로 만들어진 시나리오로는 「들쥐」·「강 건너 마을」 등 18편이 있고, 영화화되지 못한 시나리오는 「말 못할 사정」·「10년」·「황무지」·「불가사리」 4편이 있다. 연출한 작품으로는 「아리랑」·「풍운아」·「오몽녀」·「사랑을 찾아서」 등 16편이 있고, 출연 작품으로는 「임자 없는 나룻배」 등 24편이 있고, 편집한 작품으로는 「철인도」·「무화과」 등 11편이 있다.
[묘소]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에 있는 국립대전현충원에 마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