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6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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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帝强占期 |
영어의미역 | Japanese Colonial Period|Chosun under the Japanese Rule Time |
이칭/별칭 | 일제 암흑기,일제 식민 통치 시대,일본 식민지 시대,일본 통치 시대,일정 시대,왜정 시대,대 일본 전쟁기,대일 항쟁기,국권 피탈기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인호 |
[정의]
1910~1945년까지 부산 지역의 역사.
[무단 통치하의 부산]
1914년 부산에서는 부제(府制)를 공포하여 종래의 일인 거류민단법 및 거류지 제도를 폐지하였다. 종래의 부산이사청(釜山理事廳)에 부청(府廳)을 설치하고 부윤(府尹)을 두었는데, 1936년 옛 부산시청 자리인 중앙동으로 시청을 옮겼다. 1913년 12월 29일 부산을 부산부[현 부산광역시 중구·서구·동구·영도구 지역]와 동래군[옛 동래부 일부와 기장군]으로 나누었다.
관공서와 금융 기관 및 기업 등 대부분의 근대적 기구나 시설은 부산부에 편재되었다. 이후 철도 부설·도로 건설·항만 시설 등 사회 간접 자본을 확충하여 일본에서 필요한 자원과 인력 등을 효율적으로 수송하기 위한 사업이 진행되었다. 193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부산항 해륙 간 연락 설비 공사, 부산진 제1차 매축 공사[1917년 2월 준공], 절영도 대풍포 매축 공사 등이 전개되었다. 1913년부터 관부 연락선이 취항했으며, 부산을 기점으로 하는 직통 열차가 중국 동북의 장춘(長春)까지 이어졌다. 1912년 이후 부산진~온천장, 부산역~토성동, 부산우편국~토성동, 부산역~동래 온천장 구간의 전차가 개통되었다.
헌병을 동원한 무단 통치는 3·1 운동을 초래하여, 부산에서도 3·1 운동이 전개되었다. 3월 11일 좌천동[현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의 부산진일신여학교[현 동래여자고등학교]의 만세 시위를 필두로, 13일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 18일과 19일 명정학교와 범어사 지방학림, 29일 구포 장터, 4월 5일 기장면, 4월 8일 좌천면, 4월 10일 명지면에서 만세 시위가 이어졌다.
[‘문화 정치’ 시기의 부산]
3·1 운동의 결과 신문을 통해 세상 물정을 말하고 듣기가 가능했고, 일본인만의 독점적인 식민 지배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부산에서도 단절된 일본인 중심의 부산부와 조선인 중심의 동래군 간의 연계를 겨냥한 전차선 연장이나 복선화가 이뤄졌고, 동래면을 읍으로 승격하여 상대적으로 위축된 조선인 거주 지역에 일정한 활력을 불어넣고자 하였다.
1920년대에 산미 증식 계획이 실시된 이후 조선인 지주의 소유 자산이 커지면서 근대 기업이 발흥하였다. 이러한 변화에 상응하여 「조선소득세령」을 개정하여 개인 소득세 제도를 실시했는데, 부산에서도 1933년 부산세무서[부산부·동래군·양산군 구역 관할]가 설립되어 세무 행정 차원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부산 지역 유지들의 자산이 확대되자 조선총독부는 식민 통치 참여 기회를 선전하고 1930년부터 부산부 협의회 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1920년대에 들어 회사령과 관세를 철폐하자 부산항을 통한 물동량이 급증하였다. 1921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마산지점의 부산 이전, 1924년 4월 1일 경상남도청의 부산 이전, 부산상업회의소를 발족한 것 등은 기차 운송망의 확대와 항만 시설의 확장 등과 함께 부산 지역의 경제적 중요도가 그만큼 상승한 것을 말한다. 이에 전차선을 연장하고 복선으로 만드는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부산진 제2, 3차 매축 공사, 제1차 남빈 매축[현 자갈치 시장] 공사에 이어서 절영도 대풍포 매축 공사, 부산항 북빈 연안 무역 설비 공사, 부산항 제2기 해륙 간 해안 설비 공사, 남부민동 방파제 공사, 영도 대교 선류장 및 남항 방파제 공사 및 북빈 연안 무역 설비 공사를 통해 부산항이 변모되었다. 이를 통해 일본 본토와 경제적 연계가 확대되면서 관부 연락선도 크게 확충되었다.
[전시 체제하의 부산]
1930년대 이후 부산부는 기존의 부산부에 동래읍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확대되었다. 1936년 4월 제1차 행정 구역 개편을 단행하여 동래군 서면과 사하면을 부산부로 편입하고, 1942년 10월부터 제2차 행정 구역 개편을 단행하여 동래군 동래읍 일원과 동래군 사하면·남면 일원, 동래군 북면 금곡리·장전리를 부산부에 편입하였다.
1937년 중일 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 특수에 부응하여 부산항이 크게 확장되고 중국 관내와의 교역도 확충되었다. 이에 경부 지선 철도가 늘어 부산항의 물동을 분담하기도 하였다. 특히 물류항으로서 부산항의 역할이 커지면서 매축과 방파제 축조 공사가 이어졌다. 대륙 운송 측면에서 부산항과 경부 철도의 비중이 크게 확대되었다.
1938년 10월부터 부산~북경 간 직통 열차가 개통되면서 중국 관내와 조선 간의 육로를 통한 경제적 연계가 확대되었고, 효율적으로 중국의 자원을 일본 본토에 이전할 수 있게 되었다. 1943년 이후 육로 운송이 강화되자 만주, 중국, 몽고 지역의 중요 물자들이 부산항으로 집산하게 되었다. 이에 늘어나는 물량을 경부선으로 소화하기 힘들게 되자 마산선과 경전선 등이 설치되고, 1945년 3월 1일 부산~신의주 간 복선 철도가 준공되었다. 또한 이러한 철도 행정의 원활화를 위하여 1942년 12월 1일 부산지방철도국이 개국되었다.
부산의 기업가들은 남방[동남아] 고무 자원을 겨냥한 고무신 공업, 타이어 공업 등에 관심을 높였고, 마침내 1937년 3월 5일에는 남선고무동업조합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전쟁의 장기화는 오히려 물자난을 초래하였다. 부산의 기업가들은 동남아 지역으로 관심을 돌리고자 했고, 동남아에 대한 기대감은 태평양 전쟁과 함께 붐을 이루었지만 얼마가지 못하였다.
잠깐 동안 증가하던 부산의 공장도 1944년 이후 닥친 기업 정비와 1945년 4월 이후 연합군의 B-29 폭격으로 인한 건물·학교·설비의 소개(疏開)로 인하여, 해방 직전까지 약 50%의 기업체와 노동력의 63%가 감소하였다. 1945년 8월 미군 폭격기의 수정동[현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 주택가 폭격으로 한국인 및 일본인 15명이 사망하는 사건으로 전쟁의 종말이 예감되었고,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부산 지역의 일제 강점은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일제 강점기 부산의 성격]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은 항구 도시라는 특성, 전쟁 특수 또는 인력 수송을 통해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이합집산 하는 현장으로서 다문화적 성격을 확충시켰다. 하지만 일본인과의 관계는 그다지 원만하지 못하였다. 부산의 일본인들은 총독부의 시정에 재빠르게 부응하여 각종 특수를 독점하고 부를 과점하였으며, 생경한 조선인의 문화를 격멸하고 조선의 전통을 박제화 하였으며, 조선인과 실질적인 문화적 교류나 일체감 또는 동질감의 형성을 위한 노력을 거부하였다. 역으로 조선인들도 구래의 왜관에서 보았던 비루한 왜인들을 연상하면서 내면적인 멸시감을 잊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일본인들의 음지 문화와 조선인들의 왜곡된 문화가 결합하여 이후 부산 시민들의 삶을 오랫동안 부정적인 모습으로 변질시키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