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2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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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民族主義運動 |
영어의미역 | Nationalist Movement |
이칭/별칭 |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귀원 |
[정의]
근대 부산 지역에서 자본주의와 의회 민주주의 중심의 민주 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진행된 항일 독립운동의 한 갈래.
[개항기]
일제에 의해 가장 먼저 개항된 탓에 근대 문물과 사조를 수용하는 것이 빨랐던 부산은 개화 운동이 활발하여 독립협회 경남지부가 설치된 것을 비롯하여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태극학회, 교남교육회 등의 자강 운동 단체들과 연결되었다. 1907년 부상항상무회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국채 보상 운동을 벌일 것을 발의하고, 이에 호응하여 동래부 국채보상일심회, 부산항 좌천리 감선의연부인회, 좌천리 단연동맹회, 영도 국채보상부인회 등이 조직되어 상인, 농민, 교사, 학생, 언론인, 승려, 기생 등 각계각층의 광범위한 참여가 이루어졌다.
이 시기 부산의 개화, 계몽 운동은 지역 향권과 경제력을 쥐고 있었던 중인층과 객주 상인층이 이끌었다. 이들은 교육 구국론의 영향을 받아 부산 곳곳에 신식 학교를 설립하는 데 앞장섰다. 부산항에 있는 학교를 다니는 여섯 살 난 여자 아이가 “나는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열심히 공부하노라” 하고 대답했다는 당시 신문 기사를 통해 이들 학교 교육이 국권 회복 의식 고취에 중심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1910년대]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부산항의 무역업이 크게 활기를 띠자 인근 영남 지주자본이 대거 몰려들어 백산상회, 경남은행을 비롯하여 일본 상인과 경쟁할 수 있는 대규모의 자본력을 갖춘 합자 회사, 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들 조선인 자본가들은 백산상회의 안희제(安熙濟)를 중심으로 대동청년단, 조선국권회복단과 같은 항일 비밀 결사 단체에도 참여하여 나라 안팎의 독립운동 세력과 연락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는 활동을 벌였다.
부산의 3·1 운동은 주로 학생, 청년층과 기독교, 불교 계열에서 주도하였다. 부산진과 동래읍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 운동은 3월 말, 4월 초에 접어들면 농촌 지역으로 확산되어 구포장과 기장읍, 정관 좌천장 의거에서 볼 수 있듯이 높은 강인성과 격렬성을 드러내었다. 3·1 운동의 열기가 한풀 꺾인 상황에서도 학생들과 노동자들은 동맹 휴업 투쟁과 파업 투쟁으로 항쟁을 이어나갔다.
[1920년대]
3·1 운동 직후 조선인 자본가들은 전 민족적인 반일 열기가 고양되고 합법 공간이 열린 조건에서 ‘문화 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단체로서 기미육영회, 부산예월회, 부산청년회를 조직하였다. 특히 부산청년회는 ‘문화 운동’의 중핵 단체로서 각 계급 계층의 다양한 조직과 부문별 운동을 선도하였는데, 그 회관은 오랜 기간 조선인의 공회당 노릇을 하였다.
하지만 1923년 의욕적으로 벌였던 물산 장려 운동이 실패하고 조선인 회사들이 급격히 몰락하면서 ‘문화 운동’도 쇠퇴하였다. 이후 민족주의 운동은 일제와 타협하여 자치 운동을 벌이는 것을 지지하면서 사회주의 운동, 노동 운동에는 반대하는 민족주의 우파와 비타협의 절대 독립 노선을 고수하고 자치 운동을 반대하며 사회주의 운동, 노동 운동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는 민족주의 좌파로 나뉘게 되었다.
민족주의 좌파 세력은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 협동 전선을 모색하여 신간회 부산지회, 근우회 부산지회, 부산협동조합을 결성한 데 반해, 민족주의 우파 세력은 부산상공협회를 결성하고 부협 의원, 도 평의원 등 일제가 마련한 관제 지방 자치 공간으로 진출하였다. 신간회 부산지회, 근우회 부산지회는 1928년 6월 전국 복대표 대회(全國複代表大會) 이후 30대 이상 민족주의 명망가로부터 신진기예의 부산청년동맹 세력으로 주도권이 넘어갔다. 이에 따라 민족주의 운동의 입지는 크게 약화되어 갔다.
[1930년대 이후]
광주 학생 운동 이후 온건파 일색의 신간회 본부가 합법주의를 발표하고 자치 운동세력과 연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가운데 부산구 복대표로 집행 위원이 된 박문희(朴文熺, 朴文熹)가 자치론에 경도된 글을 발표하자 사회주의 진영은 격렬히 반발했으며, 부산지회에서 맨 먼저 신간회 해소론이 제기되고 마침내 1931년 5월 신간회가 간판을 내리게 된다. 게다가 1931년 만주 사변을 일으킨 일제가 침략 전쟁을 확대해 나가면서 파시즘으로 치달아 합법 공간이 극도로 쪼그라들었다. 이에 따라 그 동안 부산 민족주의 운동의 기둥 노릇을 해온 안희제가 만주 발해 농장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는 등 비타협 민족주의 운동 지도자들은 국외로 나가거나 은거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반편,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친일화의 길을 걸었다.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전시 파쇼 체제를 확립하고 침략 전쟁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기 위해 각종 동원령을 내렸으며 학생들에게도 군사 교련 훈련이 날로 강화되었다. 1940년 11월 부산제2상업학교, 동래중학교 등 조선인 학교 학생 1,000여 명이 부산 시내에서 시위행진을 벌이고 부산 병참 기지 사령관 노다이의 관사를 습격한 부산 공설 운동장 항일 학생 운동[일명 노다이 사건]은 전시파쇼 체제 아래서 전개된 최후의 대규모 학생 투쟁이었다. 이후 부산의 학생들은 조선독립당, 순국당 등 학생 비밀 결사를 결성하고 무장 봉기와 의열 투쟁을 준비해 나갔다.
[특징과 의의]
부산은 가장 먼저 개항되었을 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 내내 대일 교역이 가장 활발했으므로 근대 문물 수용이 빨라 민족주의 운동도 이른 시기에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일제가 부산을 침략과 수탈의 교두보로 삼았던 만큼 철저히 식민 도시로 개발하였고, 압도적인 자본력으로 경제권을 틀어쥐었으므로 객주를 비롯한 토착 자본가들은 몰락하거나 예속적으로 편승하는 모습을 보이고, 이에 따라 이들은 민족주의 운동에서 강인한 지속성을 보이지는 못하였다.
한편, 1910년대에 영남 지역의 지주 자본이 대거 몰려들면서 1920년대 전반기까지는 한국 민족주의 운동에서 선진적이고 위력적인 위치를 차지하였으나 이들이 퇴각하면서 급속히 쇠퇴하는 양상을 보였다.
부산의 민족주의 운동은 일본과 중국 상해의 조선인 민족주의 운동과 빈번한 인적 교류와 통신 연락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특징을 가장 잘 반영하여 진행된 것이 백산상회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운동이었다. 부산 지역 민족주의 운동은 영남, 특히 경상남도 지역 민족주의 운동을 선도하는 위상을 지니면서 국내외 민족주의 운동과 교류하고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활약한 안희제, 박재혁(朴載赫), 박차정(朴次貞) 등은 부산을 대표하는 민족주의자들로서 오늘날까지도 부산의 정신을 상징하는 인물로 기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