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5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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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釜山座 |
영어의미역 | The Busan Theater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역사/근현대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부평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충국 |
[정의]
부산광역시 중구 부평동에 있던 일제 강점기의 극장.
[개설]
부산 지역에 대중문화 공간인 상설 극장이 설립된 계기는 1876년의 부산 개항이었다. 서양은 극장 문화가 일찍이 꽃피웠던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전통적인 연극 형식의 탈춤, 꼭두각시놀음 등을 보여 주던 남사당패가 떠돌며 임시 무대를 사용하는 무형 극장 수준이었다. 개화기 부산에서 태동되는 극장을 알아보려면 일본인 전관 거류지(全管居留地) 형성과 정착 단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부산좌(釜山座)가 개관된 중구 부평동에 개항 이후에 일본 거류민이 상주하면서 상권 및 주거 지역으로 경제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건립 경위]
부산에서 처음으로 1904년에 행좌(幸座)와 송정좌(松井座) 등이 개관되었고, 이어 부산좌가 1907년 7월 15일 일본인 대지충조(大池忠助)의 합자로 개관하였다.
[변천]
부산좌의 관객은 주로 일본인이었으며 공연 내용 또한 일본의 신극과 가부끼 위주였다. 활동사진의 시대가 열리면서 일본의 연쇄극[키노 드라마]을 비롯한 영화 상영도 빈번해졌다. 개관 당시 부산좌가 행좌와 함께 부산의 유일한 공연장이었으나 그 후 생겨난 욱관(旭館), 행관(幸館), 변천좌, 보래관(寶來館), 상생관(相生館), 동양좌, 질자좌, 초량좌, 국제관(國際館), 유락관(遊樂館), 태평관(太平館) 등과 더불어 각광을 받았다. 한국에 연쇄극이 처음 들어온 것은 1915년 10월 16일에 미즈노 강게쓰 일행의 「짝사랑」이 부산좌에서 개연하면서부터였다. 1923년 3월 22일에 부산좌가 화재로 소실된 후에 재건축 논의가 수차례 쟁점화되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구성]
1900년대의 극장은 무대가 협소하여 공연을 제대로 할 수 없었으나 부산좌가 만들어지면서 700명~800명을 수용하는 큰 극장을 갖게 되었다. 주거 및 상업 중심지였던 부평동에 세워진 서양식 목조 2층 건물이었다. 당시 상영된 영화로는 「아! 무정[噫無情]」, 「수이쯔루의 풍경[スイツルの風景]」, 「마법 바구니[魔法籠]」, 「형사의 고심[刑事の苦心]」, 「짝사랑[片思ひ]」 등 일본·해외 영화가 있고, 「쿠스노기마사시게공 일대기[楠正成公一代記]」, 「시라기꾸 이야기[白菊物語]」 등 연쇄극도 상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