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5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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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壽座 |
영어의미역 | Old Theaters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역사/근현대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부산광역시 영도구 남항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최병학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광역시 영도구 남항동에 있던 극장.
[건립 경위]
1925년 4월 17일에 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전되면서 같은 해 12월에 부산 인구는 10만 명을 돌파하여 조선 제일의 항구 도시로 변모하며 각 부문에서 대변환기를 맞고 있었다. 부산 영화계도 1910년 이래, 선두 다툼을 벌이던 보래관(寶來館)을 비롯하여 행관(幸館), 상생관(相生館), 부산좌(釜山座) 4개 극장과 함께 1920년 개관된 국제관(國際館)에 이어 유락관(遊樂館), 태평관 등이 세워졌고, 1924년에는 수좌(壽座)가 들어섰다.
[변천]
1924년 사쿠라바 후지오가 인수한 행관과 수좌는 제1행관·제2행관으로도 불렸고, 배급사인 사쿠라바상회 영화를 직접 공급받으며 직영 체제로 운영되었다. 수좌는 1930년부터 1944년까지 조선 영화를 27편 상영하였으며, 1932년부터 부산 극장, 중앙 극장 등과 함께 발성 영사기를 설치하면서 부산 영화관은 발성 영화관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8·15 광복을 맞았을 때는 4천 원의 상금을 내걸고 일본식 영화관명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이름으로 태어났는데, 이때 수좌는 1946년 3월 17일에 항구 극장으로 개칭되었다. 항구 극장은 1990년 11월 13일에 폐관되었다.
[구성]
전쟁 위험이 고조되던 때인 1939년에 부산 극장, 대생좌, 태평관, 수좌에 총 12만여 명이 입장해 11만 8000여 원을 벌어들였다[『부산 일보』, 1940. 3. 15일]. 상영된 조선 영화는 1920년대 제작된 「약혼」, 「낙양의 길」, 「사나이」, 「세 동무」, 「낙화유수」, 「나의 친구여」를 포함하여 이미 오래전 개봉된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그중에는 이미 고인이 된 나운규(羅雲奎)의 영화가 가장 많이 재상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