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3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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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城堰 |
영어음역 | Goseong-eon |
이칭/별칭 | 부고개제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당감동|가야동 수정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수한 |
조선 후기 동래부 동평면에 있던 제언.
고성언(古城堰)이란 이름은 조선 시대 동평면(東平面) 지역에 있던 읍성에서 유래하였다.
고성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동래부 읍지(東萊府邑誌)』[1832]이다. 여기에는 동래부 소속 20곳의 제언(堤堰)이 소재지에 따라 분류되어 있는데, 고성언은 동평면에 축조된 유일한 제언이었다. 고성언은 둘레 약 87m[287척], 수심 약 3.64m[12척]이었다. 주목할 점은 고성언의 둘레가 당시 전국이나 경상도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반면, 수심은 반대로 두 배에 이른다. 이것은 산곡형(山谷形) 제언, 즉 평지가 아닌 산골짜기의 단면을 이용해 높이 축조하였을 때 나타나는 특징으로, 이를 통해 고성언의 입지 조건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동평면이 있던 지역에는 백양산과 음광산이 있었다. 이 산곡을 중심으로 고성언이 형성되었으리라 본다. 『경상도 속찬 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1468]에는 동래현 서쪽에 부고개제(釜古介堤)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마리산[현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산]에 고성(古城)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수정산 아래 감 고개를 ‘가마 고개’라고도 읽을 수 있다면, 고성언은 조선 초 축조된 가마 고개제[釜古介堤]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고성언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19세기는 전국적으로 제언의 중축(重築)이 활발하였으며, 동래부의 제언도 두 배 이상 늘어났다. 따라서 고성언은 조선 초 제언의 입지 조건과 기존 시설을 활용해서 이 시기 다시 쌓은 제언으로 보인다. 고성언은 1906년 일제가 수리 조합 조례를 발표하고 이어서 궁방이 관리하던 수리 시설 대부분을 국유화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고, 이후 근대적 저수지가 등장하면서 용도가 폐기된 것으로 보인다.
고성언은 조선 시대 동평면에 설치되었다는 기록에서 지금의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동과 가야동 뒤 수정산 일대의 산곡형 제언을 가리킨다.
1899년 간행된 『경상남도 여지 집성(慶尙南道輿誌集成)』 제언조에 “고성언은 동래부 서쪽 15리[약 5.89㎞] 되는 곳에 있다. 못의 둘레는 287척이며 물 깊이는 12척이다[古城堰 在府西十五里 周二百八十七尺 水深十二尺]”라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