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령시 이전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523
한자 藥令市 移轉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8년연표보기 - 약령시 이전운동 발생
해체 시기/일시 1930년연표보기 - 약령시 이전운동 무산
성격 사건

[정의]

1928년 대구 약령시 이전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

[역사적 배경]

대구 약령시경상감영의 객사(客死)인 달성관(達城館)을 중심으로 봄·가을 두 차례 정기적으로 약령 시장을 개설한 데서 시작되었다. 1908년 일제에 의한 경상감영 객사 철거대구 약령시는 남성정[현 중구 남성로]으로 이전하였다. 대구 약령시가 남성정으로 이전한 이후 약령시의 운영 및 관리는 상인들이 만든 자치 조직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조선총독부는 1914년 「조선시장규칙」을 공포하고 공공단체 또는 이에 준하는 단체가 아니면 시장을 경영할 수 없도록 하였다. 1915년에는 도령(道令)에 의하여 대구 약령시대구부(大邱府)[현 대구광역시] 관할이 되었다. 대구 약령시를 민족의식 앙양의 집결지라고 판단한 일제는 대구 약령시의 세력 분산을 위한 작업의 하나로 1923년 진주 약령시와 전주 약령시를 인가하였다. 이후 대구 약령시는 급속히 쇠퇴하였다.

대구 약령시 한약업자들은 1923년 12월 7일 약령시 진흥기성동맹회를 결성하여 대구 약령시의 부흥을 꾀하였다. 그럼에도 대구 약령시의 부활이 쉽지 않자 대구 약령시의 발전을 위한 새로운 방법으로 약령시 이전이 제기되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경영상의 개선, 생산과 정제의 장려, 가격의 정확, 위생 본위의 시설 건설, 생산자 보호책의 강구, 기타 거래 방법 등의 개선을 통하여 대구 약령시의 항구적 발전이 가능하다면서 약령시 이전운동(藥令市 移轉運動)을 반대하는 움직임도 일어나게 되었다.

[경과]

1920년대 초중반부터 대구 약령시가 급속히 쇠퇴하자 대구 약령시 한약업자들은 1928년 남성정[현 중구 남성로]과 명치정 2정목[현 중구 계산동2가], 경정[현 중구 종로2가] 일부 지역, 동성정[현 중구 동성로] 일부 지역의 약령시를 시장정[현 중구 동산동]으로 이전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당시 ‘대구 약령시 부흥 운동’을 주도한 양익순(梁翼淳)김광서(金光瑞) 등은 대구 약령시 이전을 찬성하였고, 김내명(金乃明)과 김홍조(金弘祖) 등은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대구 약령시 이전 찬성 세력들은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이전을 찬성하였다. 첫째는 약령시가 20년이 지나면서 점포가 협소하여 불편하다는 시장의 규모 협소 문제였다. 둘째는 위생을 신경 써야 하는 약재를 도로 옆이나 진개(塵芥)[먼지와 쓰레기] 옆에 쌓아 놓고 매매를 하니 차마 볼 수도 없고 부끄럽다는 위생 문제였다. 셋째는 매년 대구 약령시에 교통 문제로 경관의 단속이 많다는 것이었다. 넷째는 1929년부터 부영 자동차 회사가 개통을 시작하면 약재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교통 불편이 심해질 것이라는 것이었다.

반면 대구 약령시 이전 반대 세력들은 약종상의 입장을 떠나 시가지 균형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첫째 이유로 들었다. 약령시 이전 후보지인 시장정의 북쪽 일대는 포목상과 기타 잡종상이 시장을 형성하고 있고, 시장정 서남쪽에는 서문시장이 자리잡고 있으며, 남성정은 주로 조선인 중심지인데 시장정으로 옮겨 가면 남성정뿐 아니라 남산정[현 중구 남산동]·명치정[현 중구 계산동]·덕산정[현 중구 덕산동]·동성정 3정목[현 중구 동성로3가]·봉산정[현 중구 봉산동] 거주 조선인들은 생활 근거지가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둘째 이유는 약종상을 제외하더라도 객주, 중상(中商), 음식점, 소잡상, 노무자, 고용 아동 등 2,000여 호 1만여 명 이상이 대구 약령시에서 생계를 꾸리므로 세민(細民)의 사활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셋째 이유는 약령시를 이전하면 약종업 가운데 소규모 점포들은 10여 만 원 정도 손해를 보고, 약재 저장 창고 확보도 어렵다는 것이었다.

대구 약령시 이전 문제로 발생한 갈등은 1928년 11월 18일 대구부 내무과장이 서부와 남부를 불문하고 지금의 위치에서 약령시 부흥 운동을 진행하여야 한다고 못을 박음으로써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대구 한약업자 조합 간부 가운데 김내명, 김홍조, 신태문, 이치욱, 김영오는 대구부 내 유지 1,000여 명이 연서한 ‘약령시 이전 반대 진정서’를 대구부에 제출하였다. 시장정으로 이전을 찬성한 약종상 권영재 외 48인은 대구부에 연서한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찬성과 반대 세력의 갈등이 점차 심화되자 대구경찰서에서는 양쪽 대표를 불러 놓고 반 강압적으로 문제 해결을 종용하였다. 당시 찬성 측에서는 김광서·홍운정·양익순, 반대 측에서는 김내명·김홍조·이치욱이 참석하였다.

대구 약령시 이전운동이 진척이 없자 양익순 등 찬성 측 50여 명은 대구 약령시의 구역이라도 임시 확장하여 줄 것을 대구부에 요청하였다. 대구 약령시 이전운동으로 인한 갈등으로 대구로 오던 객상(客商)들이 전주로 감에 따라 1928년 대구 약령시의 거래량이 1927년 67만 2500엔에서 67만 5300엔으로 감소하였다.

대구 약령시 이전 찬반 논쟁은 1929년 약령시 개시가 임박하여진 10월 중순에 또다시 시작되었다. 당시 대구부윤 야마자키 사네오[山崎眞雄]는 시설의 우열로 약령시 이전 문제를 결정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전근을 하여 후임 부윤에게 전권이 넘어갔다. 그 과정에서 남성정에서 약령시가 개시되었고, 남성정 유지들은 1929년 12월 11일 대구 경제계의 진행책으로 약령시번영회를 성대하게 조직하여 대구 약령시 이전을 무산시키고자 하였다.

결국 1930년 대구부에서는 재정 문제 등을 이유로 약령시를 이전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렇지만 양익순 등이 중심이 된 약령시 진흥기성동맹회 측은 이를 반대하고 1930년 10월에는 조선총독부와 척무성(拓務省), 1930년 11월에는 경상북도지사에게 진정서를 제출하였지만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결과]

대구 약령시 이전운동대구 한약업자 조합약령시 진흥기성동맹회의 내분과 갈등을 야기하였다. 대구 한약업자 조합장이자 약령시 진흥기성동맹회장이었던 양익순김광서 등은 찬성을, 대구 한약업자 조합 부조합장 김내명과 대구 한약업자 조합 평의원 김홍조는 반대를 주장하였다. 김내명과 김홍조 등이 양익순대구 한약업자 조합에서 제명 처분까지 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갈등의 골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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