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감영 객사 철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132
한자 慶尙監營 客舍 撤去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중구 경상감영길 99[포정동 21]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8년 6월연표보기 - 경상감영 객사 철거
발생|시작 장소 경상감영 객사 철거 - 대구광역시 중구 경상감영길 99[포정동 21]지도보기
성격 사건

[정의]

1908년 대구에 있는 경상감영의 부속 건물인 객사를 철거한 사건.

[역사적 배경]

대한제국 시기 일제는 경부선 철도의 부설과 을사조약을 계기로 본격적인 내륙 침탈에 나섰다. 철도 부설과 함께 대구로 들어온 일본인들은 경상북도 관찰부와 함께 대구읍성을 헐어 버리고 난 뒤 경상감영의 객사 철거를 시도하였다.

[경과]

경상감영의 객사는 1601년(선조 34) 대구에 경상감영이 설치되면서 함께 지어졌다. 경부선 철도 부설을 계기로 대구에 일본인의 침탈이 본격화되었다. 특히 을사조약의 체결로 대구이사청이 설치되면서 경상감영선화당과 부속 건물은 일본의 관계, 군대, 경찰, 학교 등이 차지하게 되었다. 1906년 말부터 1907년에 걸쳐 진행된 대구읍성의 훼철(毁撤)을 이끌었던 박중양(朴重陽)이 1908년 6월 경상북도 관찰사 겸 경상북도 재판소 판사 칙임관 3등으로 임명되어 부임하면서 경상감영 객사 철거가 시도되었다.

경상감영 객사 주 건물은 달성관(達城館)이었다. 1908년 당시 객사는 조선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담고 있으면서 300㎡의 부지에 건평이 60㎡ 정도 되는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1907년 협성학교(協成學校)가 설립되어 있었고, 약령시가 열리던 장소이기도 했다.

경상감영 객사를 철거하려는 시도는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대구 일본인 거류민단이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무상으로 경상감영 객사를 교부 받아 허물려 하였던 것이고, 두 번째는 경상북도 관찰사 박중양대구 공소원을 건축한다는 이유를 들어 없애려 하였던 것이다.

대구부민들은 자위대를 구성하여 경상감영 객사 철거 시도에 저항하였다. 대구부민들은 ‘객사를 파괴하려는 민단을 우리 모두 일어나서 저지하자’는 격문을 만들어 부 내 곳곳에 붙이고, 밤에는 횃불을 들고 객사를 지켰다. 아울러 대구부민들은 객사 철거를 강행하려는 경상북도 관찰사 박중양을 비난하는 「중양타령」을 만들어 불렀다.

[결과]

경상감영 객사는 대구부민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수비대 1대대에 의하여 철거되고 말았다. 그 뒤 객사터와 주변 민가 자리에 도로가 개설되어 지금의 대안동에서 북성로에 이르는 길이 새로 생겼다.

[의의와 평가]

경상감영 객사 철거는 을사조약 이후 일제가 내륙 대구를 본격 침탈하면서 벌어진 사건이다. 전통 도시의 공간이 식민도시로 재편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사건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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