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성학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654
한자 協成學校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학교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인가 시기/일시 1906년 - 협성학교 인가
개교 시기/일시 1908년연표보기 - 협성학교 개교
개칭 시기/일시 1916년연표보기 - 협성학교에서 대구관립고등보통학교로 개칭
개칭 시기/일시 1925년 - 대구관립고등보통학교에서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로 개칭
성격 중등학교

[정의]

개항기 대구광역시 지역에 있었던 사립 교육 기관.

[교육 목표(교훈 포함)]

협성학교는 대구에서 관계와 지역사회가 연대하여 개교한 근대 중등학교이다. 협성학교의 교육목표는 1906년 3월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가 내린 “오늘날의 급선무는 오직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양성하는 길만이 밭을 일구고 재물을 불리는 도구가 될 것이다”라는 교육 진흥 조칙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 1907년 『황성신문』은 협성학교의 설립 취지에 대하여 “…어리석은 사람을 깨우치는 데 책임을 다하였다. 몸소 실천하여 세계에 개척하여 발전시킬 저명한 기력과 정신을 우리 대한 백성의 머리에 몸 가운데 채워 넣고자 한 간절한 사상이다”라고 보도하였다. 협성학교의 교육목표는 취지서와 같이 “교과 정도는 문자와 언어로 세계와 소통하고, 나라 간의 교류하는 법률에 통달하며, 공업·상업·기술·수학 등 생활에 도움이 되고, 시무에 통달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에 두었다.

[변천]

협성학교는 1906년 대구 최초의 초·중등 교육기관으로 설립된 달성학교의 고등과를 변경하여 개교하였다. 협성학교는 1910년 한일병합 후 조선총독부의 설립 인가를 받았으며, 1916년 5월 대구관립고등보통학교로 변경되었다. 대구관립고등보통학교는 협성학교 재학생 중 일부 학생과 새로이 선발한 신입생 등 121명으로 개교하였다. 대구관립고등보통학교는 1925년 4월 교명을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로 변경하였다.

협성학교는 1906년 1월 대구 유림과 계몽운동 세력들이 낙육재양사재의 재산을 합하여 중등과정의 민립 학교를 설립할 뜻을 학부에 보고하면서 설립이 추진되었다. 협성학교의 재산은 경상북도 관찰부의 낙육재, 양사재, 향교 등의 토지와 조세 수입으로 구성되었다. 협성학교달성학교 자리에 교사를 신축하다 1907년 12월 화재가 나서 개교가 미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1908년 6월 대구향교에 교사를 신축하여 개교하였다.

[교육 활동]

협성학교는 서상하를 교장으로 하여 근대 중등 교육을 실시하였다. 협성학교는 학교 운영에 관련된 학교의 임원 개선, 교과목 선정, 학사 행정 등에 대하여 대한협회 대구지회와 협의하여 추진하였다. 협성학교는 1908년 경북관찰사 박중양(朴重陽)협성학교를 폐지하고 제2보통학교를 설립하고자 하는 것에 강하게 반발하며, 학교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박중양협성학교를 없애기 위하여 대한협회 대구지회의 일부 회원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경북관찰사 박중양협성학교 폐지 시도는 박중양의 객사 철거와 맞물려 대구 사람들이 만들어 부른 ‘떠나갔네 떠나갔네 협성학교 떠나갔네, 일도(一道) 청년 어이할꼬 애구(哀邱) 대구 흥’이라는 내용의 「중양타령」에 담겨 비난을 받았다.

협성학교는 심상과와 고등과로 운영되었다. 심상과는 윤리, 독서, 작문, 역사, 지리, 산술, 경제, 박물, 물리, 화학, 도서, 외국어, 체조 등으로 교과를 구성하였다. 고등과는 정치, 법률, 독서, 산술, 경제, 박물, 물리, 화학, 외국어, 공업, 농업, 상업, 의학, 측량, 체조 등으로 교과를 구성하였다. 협성학교는 운동회와 수학여행 등의 학교 활동을 운영하였으며, 홍주일(洪宙一)·안확(安廓)·장지필 등 계몽운동에 참여한 인물들로 교사를 꾸렸다. 또 달성학교 교사 경험이 있던 일본인 기쿠가와 게이운[菊川溪雲]이 포함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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