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005
한자 大丘邑城|大邱邑城
이칭/별칭 대구부성(大丘府城,大邱府城)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재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건립 시기/일시 1736년 - 대구읍성 착공
조성|건립 시기/일시 1737년연표보기 - 대구읍성 완공
개축|증축 시기/일시 1870년 - 대구읍성 보수 착공
개축|증축 시기/일시 1871년 - 대구읍성 보수 완료
개축|증축 시기/일시 1907년연표보기 - 대구읍성 파괴
성격 성곽

[정의]

조선 후기 대구부 중심부에 돌로 쌓은 성곽.

[개설]

대구읍성은 ‘대구부성’이라고도 하며, 경상감사 민응수(閔應洙)가 주도하여 1736년 4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737년 6월에 완공하고 11월에 선화당에서 준공식을 하였다. 읍성이 퇴락할 즈음, 경상감사 김세호(金世鎬)가 보수공사를 주도하여 1870년(고종 7) 3월~4월에 착공하여 1871년 11월에 마쳤다. 그러나 개항 이후 1900년대에 경부선이 개통되고 대구역 주변으로 일본인 이주자들이 급증하면서 읍성 철거 모의가 진행되었다. 결국 1907년 4월에 대구군수이자 경상북도관찰사 서리였던 박중양이 일본인들과 함께 성벽을 완전히 철거하였다.

[건립 경위]

1601년 대구부경상감영이 설치되었고, 1728년(영조 4) 영조의 즉위를 반대한 무신란(戊申亂)을 겪으면서 경상감영과 대구부민을 보호할 견고한 방어 시설인 성곽이 필요하게 되었다.

[위치]

과거 대구읍성이 있던 자리는 동성로, 남성로, 서성로, 북성로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형태]

대구읍성은 둘레가 2,120보, 높이는 서남쪽이 18척, 동북쪽이 17척, 뒤의 축대는 너비가 7보 높이가 3급이었다. 4개의 정문은 쌍무지개 모양으로 문루가 있었고, 동남쪽과 서북쪽에 암문(暗門)인 동소문과 서소문을 설치하였다.

[현황]

대구광역시와 대구광역시 중구에서는 대구읍성 역사문화경관을 살리기 위한 여러 가지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1728년 영조의 즉위를 반대하며 일어난 삼남 지방의 반란을 겪으면서 각 도의 중심지인 감영을 지킬 읍성이 필요하게 되었다. 읍성 축조를 통하여 외침과 민란의 방어를 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대구읍성 축조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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