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505
한자 金光瑞
영어공식명칭 Kim Kwangseo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8년연표보기 - 김광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0년 5월 - 김광서 대구청년회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23년 7월 - 김광서 운수노동자친목계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23년 11월 - 김광서 서문시장 상인들을 중심으로 단연계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24년 - 김광서 운수노동자친목계 명칭을 대구노동친목계로 변경
활동 시기/일시 1925년 7월 - 김광서 대구노동친목계를 대구노동친목회로 전환
활동 시기/일시 1926년 - 김광서 대구노동친목회 회장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김광서 대구노동친목회 명칭을 대구노동회로 변경하고 회장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32년 - 김광서 횡령·배임 혐의로 체포
출생지 동산동 -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지도보기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노동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대구노동회 회장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노동운동가.

[개설]

김광서(金光瑞)[1878~?]는 대구노동회 회장을 맡아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나 1929년 원산총파업 때 어용노조 활동을 하였고, 대구노동회의 자금을 횡령·배임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활동 사항]

김광서는 1878년(고공 15)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에서 태어났다. 줄다리기대회에서 늘 맨 앞에 설 정도로 완력의 소유자였고, 서당에서 3년 동안 한문을 배운 것이 학력의 전부이다. 목수를 시작으로 봇짐장사, 쌀장수, 해산물 위탁업을 하다가 영산조합(營山組合)을 운영하였다.

김광서는 1920년 5월 대구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3년 7월에는 대구노동공제회신재모(申載模) 등과 함께 대구역에서 짐을 옮기며 생활하는 운수노동자들을 규합하여 운수노동자친목계를 결성하여 운수노동자의 경제적 이익을 옹호하였다. 11월에는 신재모·최학석(崔學錫)·김상원(金相元)·오호동(吳鎬東) 등과 함께 서문시장 상인들을 중심으로 단연계를 결성하였다. 1924년 김광서가 가입한 운수노동자친목계는 결성 이후 회원이 늘어나 단체명을 대구노동친목계로 바꾸었다. 그 뒤에도 대구노동친목계의 회원이 늘어나자 1925년 7월 대구노동친목계를 대구노동친목회로 전환하였고, 대구역 운수노동자로 구성되는 노동조합을 창립하였다.

김광서신재모 등 진우연맹원들이 일제의 탄압을 받은 이후 1926년 대구노동친목회의 회장이 되었고, 1927년 6월 대구노동친목회의 명칭이 대구노동회로 변경되었을 때에도 회장을 맡았다. 대구노동회는 노동자의 지위 향상, 생활 안정, 상호 부조 등 대구노동친목회의 3대 강령을 계승하였다. 김광서는 1928년 약령시 이전 문제가 대구의 주요 사안으로 부각될 때 이전을 주장하는 편에서 활동하였다.

1929년 원산총파업이 일어나자 김광서는 총파업을 방해하는 어용노조 활동을 벌이다가 원산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1932년 8월에는 횡령·배임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고, 1933년 7월 대구지방법원에서 횡령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자 항소하였다. 1933년 12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보다 높은 형량인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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