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노동공제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247
한자 大邱勞動共濟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0년 6월연표보기 -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 결성
개칭 시기/일시 1923년 1월 28일연표보기 -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에서 대구노동공제회로 개칭
성격 노농운동 단체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에 있던 노농 단체.

[개설]

1920년대 대구 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노농운동 단체이다. 대구 지역의 농민운동을 조직, 지도하였고, 노동운동 단체를 설립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설립 목적]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에서 대구노동공제회로 전환한 것은 그간의 계몽운동에서 노농운동으로 전환하기 위한 것이었다.

[변천]

대구노동공제회는 1920년 6월 결성된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가 전신이다.

1923년 조선노동공제회가 분열되고, 조선노동연맹회가 결성되는 등의 변화가 나타났다. 조선의 사회운동이 계몽운동에서 계급에 기반한 노농운동으로 전환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도 1923년 1월 28일 제4회 정기총회에서 이름을 ‘대구노동공제회’로 바꾸었다. 아울러 회장제를 위원제로 전환하였다. 그에 따라 25명의 집행위원이 뽑히고, 그중에 박기돈이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구노동공제회는 결성 직후 1923년 3월 9일 농민대회를 개최하여, 농민 문제를 주요 활동 방침으로 설정하였다. 농민대회는 김하정의 개회사에 이어 정운해의 선언서 및 결의 사항 낭독으로 진행되었고, 대구 인근 각 면을 담당할 위원을 선정하여 농민운동을 펼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하여 대구노동공제회는 대구 인근의 달성군 11개 면에 소작조합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23년 5월 노동공제회관에서 정운해 등 53명이 모여 규약 등을 결의하고, 1개월 이내 달성군 소속의 각 면에 소작인조합을 결성하기로 하였다. 대구노동공제회의 노력에 힘입어 1925년 3월 현재 달성군의 가창면, 성서면, 옥포면, 화원면, 논공면, 해안면, 월배면 등 7개 면에 소작인조합이 조직될 수 있었다.

대구노동공제회는 소작인조합의 결성이 성과를 보이자 대구노동공제회 내에 농민부를 설치하고, 대구노동공제회의 간부로 조직된 중앙위원회와 달성군 내 각 면의 소작인조합 대표로 조직된 지방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중앙위원회는 선전과 조직을 전담하면서 지방위원회와 함께 구체적인 실행 방침을 논의하여 각 면의 소작운동을 지도하였다. 또한 달성군의 가창, 논공, 성서 등에서 소작인 운동을 펼치다 소작지를 잃은 농민들을 위하여 낙작인회(落作人會)를 조직하여 지주들의 소작권 이동에 맞서고자 하였다. 이처럼 대구노동공제회는 안으로는 소작인의 단결, 밖으로는 소작 조건 개선을 당면한 실천 목표로 설정하였다.

대구노동공제회는 소작 조건 개선에서 지세의 지주 부담과 소작료 반분을 가장 강조하여 소작인조합운동의 당면 목표로 설정하였다. 대구노동공제회는 농민운동의 최종 목표를 ‘생산자를 본위로 하는 토지의 사회화’로 설정하였다. 그것은 1925년 1월 1일 『시대일보』 신년호에 정운해가 기고한 「소작운동의 현재와 장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구노동공제회는 직업별 노동조합 설립 활동도 지속하였다. 1924년 4월에 대구 지역 37개소의 이발소 직공들이 이발직공조합을 창립할 때 원조 활동을 펼쳤다. 1925년 10월 신문배달원 70여 명으로 ‘지식 계발과 인격 향상, 상호 친목과 단결로써 사회의 정의적 봉공을 목적함’이라는 강령을 채택한 가운데 대구신문배달조합을 조직하고, 11월 1일에는 대구재봉직공청년회를 조직하였다

[의의와 평가]

대구노동공제회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 시기 직업별 노동단체에서 대구노동공제회로 전환하면서 소작 조건 개선을 목표로 하는 소작인운동을 전개하는 동시에 직업별 노동단체 결성 활동을 강화하였다. 따라서 대구노동공제회는 대구 지역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의 지도 기관의 성격을 나타내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