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972
한자 金泰洪
영어음역 Gim Taehong
이칭/별칭 살매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교육/언론·출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성지로61번길 30[연지동 322]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순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시인
성별
대표관직|경력 『시문』 동인|『부산 일보』 논설위원|충렬고등학교 교장
출생 시기/일시 1925년 3월 20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51년 - 해인대학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46~1951년 - 마산공립여자중학교 교사
활동 시기/일시 1951년 - 『낙타』 동인
활동 시기/일시 1951년 - 마산상업고등학교 교사
활동 시기/일시 1954~1955년 - 『시문』 동인
활동 시기/일시 1960년 - 『부산 일보』 논설위원
활동 시기/일시 1960년 - 부산시 문화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60년 - 5·16 군사 쿠데타로 구금
활동 시기/일시 1963년 - 교직에 복직
활동 시기/일시 1972년 - 부산시교육위원회 연구원
활동 시기/일시 1975년 - 제17회 눌원 문화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85년 - 충렬고등학교 교장
몰년 시기/일시 1985년 11월 4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1년 5월 - 김태홍 시비 ‘관해정에서’ 건립
추모 시기/일시 2001년 11월 - 김태홍 시비 ‘마산은’ 건립
출생지 김태홍 출신지 - 경상남도 창원군 창원면 소계리 306
거주|이주지 김태홍 거주지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연지동 322
수학|강학지 해인대학 - 경상남도 마산시
묘소|단소 백운 공원묘지 -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지도보기

[정의]

현대 부산에서 활동한 교육자이자 언론인이며 경남·부산 지역 민족시의 부피를 키운 시인.

[활동 사항]

김태홍(金泰洪)[1925~1985]의 호는 살매이다. 1925년 3월 20일 경상남도 창원군 창원면 소계리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광복 후인 1946년부터 1951년까지 마산공립여자중학교[현 마산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였으며, 1950년 해인대학[현 경남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하였다.

김태홍은 1947년 염주용이 주재하던 『문예 신문』에 「고향」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1950년 첫 시집 『땀과 장미와 시』를 상재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에 나섰다. 1951년에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약칭 문총] 마산지부 회원으로 김춘수(金春洙), 김수돈(金洙敦), 김세익, 천상병(千祥炳)과 함께 동인지 『낙타(駱駝)』를 발간하는 등 6·25 전쟁 기간에 마산 문단을 이끌었다. 이때 마산상업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후 1950년대에는 마산과 부산을 오가며 교직 생활 틈틈이 시작 활동을 펼쳤다.

1954~1955년에는 부산에서 교직에 몸담고 있던 손동인·안장현과 함께 동인지 『시문(詩門)』의 동인으로 활동하며 2집까지 출간하였다. 1950년대 후반에는 『부산 일보』 논설위원으로, 한성여자실업초급대학[현 경성대학교]과 부산여자대학[현 신라대학교]에 출강하였고 부산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문필 활동을 이어나갔다.

김태홍은 두 번째 시집 『창』과 세 번째 시집 『조류의 합창』에서부터 초기의 서정시 계열에서 벗어나 전후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는데, 4·19 혁명은 김태홍의 이러한 현실주의 감각을 한껏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4·19 혁명 시기에 김태홍은 『국제 신보』 논설위원이던 이병주와 함께 가장 많은 정론을 쏟아 내며, 지식인으로서의 소명 의식을 다하고자 하였다. 경남·부산 지역 문인 가운데에 김태홍만큼 4·19 혁명에 관한 시를 많이 쓴 시인도 드문 편이다. 1960년 5·16 군사 쿠데타로 구금되었다가 1963년 교직에 복직된 이후에도 시작 활동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는데, 이는 네 번째 시집 『당신이 빛을』에 집약되어 있다.

이후 다섯 번째 시집의 제목 『공(空)』에서 드러나는바, 선적 상상력에 기댄 흔적이 드러나고, 이는 여섯 번째 시집에서 더욱 심화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도 김태홍은 4·19 혁명의 정신을 민족 통일에 대한 지향으로 발전시켰을 만큼 민족시의 뚜렷한 지평을 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김태홍의 문학 활동은 권환, 정진업(鄭鎭業)으로 이어지는 경남·부산 지역 민족시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계승한 것이다.

1972년 부산시교육위원회 연구원을 지냈고, 1985년 충렬고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그해 11월 4일 췌장암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정론 직필의 언론인이자 경남·부산 지역 민족시의 부피를 키운 시인은 ‘너그러운 황소의 눈’을 감고 말았다.

[학문과 저술]

다음과 같이 6권의 시집과 수필집, 시론집이 있다. 김태홍·안장현·손동인, 『시문(詩門)』 1~2집[남광문화사, 1954~1955], 『땀과 장미와 시』[흥민사, 1950], 『창』[자유문화사, 1954], 『조류의 합창』[인간사, 1958], 『당신이 빛을』[친학사, 1965], 『공』[시문학사, 1973], 『훗날에도 가을에는』[갑인출판사, 1982], 『살매 서정 시선』[갑인출판사, 1982], 『시론과 시조론』[부산시교육위원회, 1974], 『시와 산문』[신한출판사, 1984], 수필집 『고독은 강물처럼』[인간사, 1963].

[묘소]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백운 공원묘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60년 부산시 문화상[현 부산광역시 문화상], 1975년 제17회 눌원 문화상[문학 부문]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곳곳에 시비가 건립되었는데,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연지동 한신 타워 입구에 ‘당신이 빛을’, 용두산 공원에 ‘잊을래도’, 마산 산호 공원 시의 거리에 ‘관해정(觀海亭)에서’[1991년 5월], 국립 3·15 민주 묘지에 ‘마산은’[2001년 11월]이란 김태홍 시비가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