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74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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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周禮洞南平文氏世居地 |
영어의미역 | Residential place of Nampyeong Mun clan in Jurye-dong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오인택 |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에 있었던 남평 문씨 세거지.
남평 문씨(南平文氏) 충선군 문익점(文益漸)이 거주하였던 곳이 강성[단성 혹은 산청]이어서 사후에 강성군(江城君)으로 봉하여졌다. 이후 그 후손들이 강성을 본관으로 하는 강성 문씨 충선군파, 혹은 남평 문씨 충선군파로 불리기도 하였다. 원래 남평 문씨 일족이었기 때문이다.
남평 문씨[강성 문씨]의 충선공파 파조인 문익점의 후손은 이후 5개의 분파로 나뉘었는데, 그중 의안공파에 속하였던 문평(文苹)은 조선 전기 강성에서 동래로 이주하여 남평 문씨[강성 문씨] 동래 문중 파조가 되었다. 이후 동래 문중은 120~180여 년 이상 번창하면서 대대로 거주하던 동래부의 각 지역에 따라 7개의 문중[성안파, 사상파, 초읍파, 북면파, 금사파, 거벌파, 반여파]으로 분화하였다. 이 가운데 사상파 동래 문중이 대대로 살던 주례동을 주례동 남평 문씨 세거지라 불렀다.
주례동(周禮洞)의 지명은 농민들이 농번기에 농사일을 공동으로 하기 위하여 부락이나 마을 단위로 만든 조직인 두레를 한자로 옮기면서 생겼다고 한다. 또 두레가 발달된 이 지역 지명을 정할 때 주나라 주희(朱熹)가 지은 책인 『주례(周禮)』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도 한다.
문익점의 손자인 의안공파 문평이 조선 태종(太宗) 대인 1410년경 동래로 입향하였다. 16세 문응필(文應弼)이 초읍에 이거하고 그 아들인 17세 문진명(文進明)[1578~1641] 대를 지나 그 아들 문언수(文彦守)[18세]가 1600년대 초반 주례동으로 세거지를 옮겼다. 1623년 사상 향안에 문진명의 아들 문언수와 문언해(文彦海)가 실려 있고, 31명의 후손이 기재되어 있다.
주례동은 크게 보면 금정 산맥과 낙동강 사이에 위치한 평야 지대에 속한다. 구체적으로는 백양산(白楊山)과 엄광산(嚴光山)을 등지고 형성된 지역이다. 마을은 두 산의 산기슭과 낙동강으로 연하는 평야 지대에 위치한다. 하천으로 백양산에서 발원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학장천이 있다.
2013년 현재 주례동에서는 남평 문씨[강성 문씨] 33세손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동래 문중에 속한 7개 파 회원 가운데 사상 문중으로, 금정구 남산동에 있는 동성재에서 제사를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