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73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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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華明洞淸州楊氏世居地 |
영어의미역 | Residential place of Cheonju Yang clan in Hwamyeong-dong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 화잠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백이성 |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에 있는 청주 양씨 세거지.
조선 시대 이 지역은 양산군 좌이면 와석리로 불렸다. 현재의 북구 화명동의 상징인 화산은 신선덤이라는 암봉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그 형상이 신선이 누워 있는 것같이 보여 와석(臥石)이라 칭하였다고 전한다. 조선 후기 화산의 묏부리라는 뜻으로 화잠(華岑)이라 개칭하였다. 화잠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화잠 마을로 불렸다.
청주 양씨(淸州楊氏)는 선비의 고장으로 불리는 충청북도 청주를 본관으로 하는 우리나라 12개 토속 성씨 가운데 하나로,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재를 길러 낸 문중이다. 17세기 초 대구 수성구의 청주 양씨 위포 문중 일파였던 입향조 양진성(揚震成)이 현 북구 화명동 화잠 마을로 옮겨 왔다. 화잠 마을이 배산임수(背山臨水), 즉 뒤로는 금정산 줄기인 화산과 앞으로는 낙동강이 흘러 사람이 거주하기 좋은 입지 조건을 가진 것을 보고 정착하였던 것이다.
대표 인물로 일제 강점기 서울 경성의전 출신으로 의사가 된 양봉근(楊奉根)이 있다. 그는 독립운동 단체인 신간회 지부장을 맡아 활동하다 요시찰 인물로 감시를 당하자 만주로 들어가 조선족 자치주 길림성 연길에서 의사로서 여생을 보냈다.
금정산 남쪽 상학산에서 마을 쪽으로 뻗어 내린 산이 화산인데, 이 화산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다. 화산에서 동쪽으로는 파류봉 아래 금정산성으로 통하는 옛길이 있고, 북쪽으로 용동골을 끼고 대천 마을, 남쪽으로 함박봉을 경계로 수정 마을이 자리한다. 강변 쪽으로 들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화명동의 중심지였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2013년 현재 화잠 마을에는 청주 양씨가 몇 가구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