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310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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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炫 |
영어공식명칭 | Kim Hyoun |
이칭/별칭 | 김광남(金光南),김남열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주언 |
출생 시기/일시 | 1942년 7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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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61년 - 김현 서울대학교 불문학과 입학 |
활동 시기/일시 | 1962년 - 김현 「나르시스의 시론」[평론]으로 등단 |
몰년 시기/일시 | 1990년 6월 27일![]() |
출생지 | 김현 출생지 -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남동리 535![]() |
거주|이주지 | 김현 거주지 - 전라남도 목포시 |
학교|수학지 | 김현 수학지 - 서울특별시 |
학교|수학지 | 김현 수학지 - 프랑스 알사스 스트라스부르 |
활동지 | 김현 활동지 - 서울특별시 |
성격 | 학자|문학평론가 |
성별 | 남 |
본관 | 경주 |
대표 경력 | 서울대학교 교수|문학평론가 |
[정의]
전라남도 진도 출신의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
[개설]
김현(金炫)[1942~1990]은 서울대학교 불문학과 교수를 지낸 한국의 대표적인 문학평론가로 비평을 문학 장르로 끌어올린 최초의 비평가였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본명은 김남열(南烈)이며, 자는 광남(光南)이다.
아버지 김요환은 읍내 한복판 남문터에서 구세약방을 경영했고, 어머니 정순예는 진도 부자 정기욱의 둘째 딸이었다. 할아버지 김경원은 군내면 면소재지 분토리 자기 집 사랑방에서 진도 최초로 성경 공부를 시작한 개신교 개척자였다. 김경원의 형 김형오는 평양신학교를 나와 목회 활동을 했고, 한때는 군내면장으로 지역 일을 맡기도 했다. 현재 분토리에는 ‘진도초대교회’가 있어서 김현의 할아버지로부터 발흥된 진도의 기독교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김현이 아버지에 대해 “성경 말씀으로 시작하여 성경 말씀으로 끝나는 분”으로 표현한 것만으로도 철저한 기독교 집안임을 알 수 있다.
김현의 큰외숙 정경옥은 진도에서 처음으로 미국에 유학한 신학자로 한국신학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그는 학교가 태평양전쟁으로 폐교에 이르자 고향에 와서 보향단을 결성하여 진도의 항일운동을 이끌다가 투옥되었고, 이후 광주 양림교회에서 청년들을 지도하였다. “우리는 예수님을 교회당 안에서만 만나지 말고, 모시고 밖으로 나와 생시의 살아 있는 교훈을 뒤따라 배워야 한다!”고 외쳤다. 김현의 어머니는 이러한 큰오빠 자랑이 1번, 6.25전쟁 때 완도군수를 지내다 납북된 작은오빠 정진옥 자랑이 2번이었다고 한다. 김현은 “판사나 검사를 하지 않고 문학 나부랭이를 했다고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나를 꾸짖었다.”고 술회했다.
[활동 사항]
김현은 1942년 7월 29일 진도군 진도읍 남동리 535번지에서 4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선창에 나가 서너 시간씩 바다를 바라보고 앉아 있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금도 내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면, 옻나무와 발목까지 빠지던 펄의 감촉이 맨 처음 되살아 나오고, 가도 가도 끝이 없던 여름날의 황톳길의 더위와 모깃불의 매캐한 냄새가 나를 가득 채운다.”고 했다.
김현은 가끔 군내면 분토리 할아버지 댁을 다녀오고, 선창에 놀러 다녔다. 할아버지 집은 7, 8세의 어린이에게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너무나 덥고 먼 황토길이었다. 정걸음재 고개를 넘어 월가리를 건너 보면서 내동산 외동산리를 지나야 했다. 양골 두 골짜기 물이 모아지는 칠산(漆山)을 지날 때는 옻나무를 조심해야 한다. 손을 댔다가는 ‘옻이 오르는’ 피부병 때문이었다. 논두렁과 냇물을 지나면서는 발목이 진흙에 빠질 때도 있었다. 시골 여름 초저녁은 어디서나 매캐한 모깃불 냄새가 마을에 퍼져나갔다.
할아버지로부터 이어지는 철저한 기독교 집안 분위기에 외삼촌 정경옥 목사의 영향과 부자 외할아버지의 여유로운 인품이 더해져 그의 성장기 문학적 토양이 되었다고 보아진다. 외할아버지 정기욱은 가족에게 자기 장례식의 예행연습을 시켰다. 그 시대에 장남을 미국에 유학시켰는데 예수쟁이가 되어 신학대학 교수를 한다니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말미에는 장례식에서 온 식구가 찬송가를 부르도록 연습을 시켰다. 구세약방이 목포로 이사를 하여 김현은 진도국민학교 1학년 때 목포북교국민학교로 전학했다. 그의 나이 여덟 살 때였다. 그리고 6.25전쟁이 일어나자 진도읍 서외리 이모네 집으로 잠시 피난하기도 했다.
김현은 목포북교국민학교와 목포중학교를 마치고 서울경복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 입하하였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대학원에 유학했다. 프랑스 과학철학의 창시자 가스통 바슐라르 연구자인 망슈이 교수 밑에서 수학했다. 김현의 문학평론이 분석과 해체주의적, 실존적 정신분석의 비평을 토대로 하는 배경이 되었다.
김현은 1962년 대학교 2학년 때 『자유문학』에 평론 「나르시스의 시론」으로 등단했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이 김광남에서 김현이 되었다. 김현의 등장으로 1960년대 중반 우리나라 비평계가 활발하게 움직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2년 김치수, 김병익, 김승옥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 동인지 『산문시대』를 창간 주도하였다. 이는 동인회 ‘68그룹’ 결성으로 이어졌고, 1970년 김병익, 김주연, 김치수와 함께 문학 계간지 『문학과지성』를 창간하여 『창작과 비평』과 함께 한국의 양대 문예지 시대를 여는 기틀이 되었다. 1980년 이들 두 문예지는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었다.
김현은 『문학과 지성』 창간호에 실린「한국소설의 가능성」에서 “진정한 예술은 삶과 현실의 모순을 제기하고, 그러한 모순을 개인의 의식 속에 존재시킴으로써 그 개인을 고문한다. 한국 소설의 가능성은 고문하는 그 기술 형식을 발견하는 데서 찾아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였다.
김현은 1971년에서 1974년까지 서울대학교 교양과정부 전임강사를 거쳐 1990년 사망하기 전까지 불어불문학과 교수를 지냈다. 김윤식 교수와의 공저인 『한국문학사』는 문학도들의 필독서로 꼽힌다.
무엇보다도 김현은 8권의 평론집을 발간해 문학평론 분야에서 선구적 역할로 많은 이론적 기틀을 마련했다. 30년 가까이 쌓아 올린 문학적 업적과 그로부터 문학적 영향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수십 명의 젊은 평론가·시인·소설가들이 오늘의 한국문학을 단단하게 떠받치고 있다.
김현은 1990년 6월 27일 48세에 과로로 인한 간경변으로 타계했다. 목포문학관에는 박화성, 김우진, 차범석과 함께 김현이 소개되고 있다. 문학실험실은 ‘김현 문학패’를 제정하여 시행하고 있으며, 문학과지성사는 그의 모든 저서를 모아 『김현문학전집』을 펴냈다.
[저술 및 작품]
김현의 저서로는 『김현문학전집』16권[1993], 평론집 『존재와 언어』[1967], 『상상력과 인간』[1973], 『사회와 윤리』[1974], 『문학과 유토피아』[1980], 『젊은 시인들의 상상세계』[1984], 『책읽기의 괴로움』[1984], 『분석과 해석』[1988], 『말들의 풍경』[1990] 등이 있다. 연구서로는 『한국문학사』[1973, 공저], 『한국문학의 위상』[1977],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1987], 『시칠리아의 암소: 미셸 푸코 연구』[1990] 등이 있다. 김현은 48년 평생에 23권의 책과 6권의 공저, 7권의 편서, 19권의 번역서를 남겼다. 여기에 다양한 논문과 소설 등 240편을 썼다.
[상훈과 추모]
김현은 1980년 현대문학상, 1988년 외국문학논문상, 1989년 제1회 팔봉비평문학상을 받았다. 사후인 2002년 보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