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857
한자 李福健
영어공식명칭 Lee Bokgeo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8일 - 이복건 대구 서문시장 만세 시위 참여
출생지 신리 -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리
거주|이주지 신리 -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리
학교|수학지 성경학교 - 대구광역시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이복건(李福健)[?~?]은 지금의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리에서 태어났다. 대구 성경학교(聖經學校)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활동 사항]

이복건은 칠곡 신동교회 교인으로, 1919년 당시 대구 성경학교 강습생으로 공부하고 있었다.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확산되고 있을 때 장로파 예수교회 조사 이태학(李泰鶴)이 만세 시위를 확산하기 위하여 대구로 내려왔다. 3월 7일 성경학교 기숙사에서 학생들에게 만세 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는데, 이미 성경학교 강습생들은 3월 8일의 만세 시위에 참여할 것을 결정한 상황이었다.

1919년 3월 8일 이복건은 성경학교 강습생 20여 명과 함께 서문시장으로 집결하였고, 오후 3시 이만집의 연설과 김태련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계성학교·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반인들이 합세하여 시위 군중은 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서문시장을 나선 시위대는 대구경찰서와 종로를 거쳐 동성로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동성로에 있던 달성군청에 이르자 기관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일제 군경은 시위 군중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여 157명을 검거하고 그중 67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때 이복건도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았고,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이복건은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지만 7월 21일 경성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