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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556
한자 金永瑞
영어공식명칭 Kim Yeongseo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0년연표보기 - 김영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8일 - 김영서 대구 3·8 서문시장 만세 시위 참가
몰년 시기/일시 1975년연표보기 - 김영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김영서 대통령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김영서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좌천동 -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거주|이주지 남산정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지도보기
활동지 계성학교 - 대구광역시 중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계성학교 교감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김영서(金永瑞)[1880~1975]는 1880년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서 태어났다.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교감으로 재직 중이던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를 주도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활동 사항]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인 2월 24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이갑성(李甲成)은 경상도 지방의 만세 시위를 조직하기 위하여 대구에서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 이만집(李萬執) 등과 접촉하였다. 2월 26일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 김문진(金文珍)이 대구로 특파되었다. 이후 이만집은 신정교회 목사 정재순(鄭在淳)을 비롯한 개신교 관련 인사들과 계성학교 교사들을 만나 만세운동에 대해 협의하였다.

당시 계성학교 교감이자 신정교회 장로였던 김영서이만집·정재순을 비롯하여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金兌鍊), 천도교 대구교구장 홍주일(洪宙一), 의료계에 종사하던 정광순(鄭光淳), 계성학교 교사 백남채(白南採)·김태식(金台植)·권의윤(權義允)·최경학(崔敬學)·최상원(崔相元), 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이재인(李在寅)·임봉선(林鳳仙) 등과 함께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으며,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하였다.

3월 8일 만세 시위 당일 계성학교 학생 100여 명이 귀가를 가장하여 서문시장 근처로 집결하였고,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대구 성경학교·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반인들이 합세하였다. 오후 3시 이만집의 연설과 김태련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학생들이 주축이 된 700여 명의 시위대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서문시장을 나서서 대구경찰서와 종로를 거쳐 동성로 쪽으로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동성로에 있던 달성군청에 이르자 기관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일제 군경은 시위 군중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여 157명을 검거하고 그중 67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김영서도 이때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았고,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영서는 1975년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영서의 공적을 기려 1977년 대통령표창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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