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579
한자 金在炳
영어공식명칭 Kim Jaebyeong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3년 1월 26일연표보기 - 김재병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0일 - 김재병 대구 동문시장 만세 시위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30년 4월 24일연표보기 - 김재병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11년연표보기 - 김재병 대통령표창 추서
출생지 계산동 -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 지도보기
활동지 동문시장 - 대구광역시 중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재병(金在炳)[1893~1930]은 1893년 1월 26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에서 태어났다. 전당포를 운영하고 있던 1919년 3월 10일 동문시장에서 열린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활동 사항]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대구에서도 계성학교·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대구 성경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3월 8일 서문시장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한 계성학교 학생들은 3월 9일에 학교와 서문시장 인근의 달성공원에서 2차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으나 시위 계획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무산되었다. 이에 김재병계성학교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협의하여 3월 10일 덕산정[현 중구 덕산동 일대] 동문시장에서 2차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김재병 등은 3월 10일 오후 4시 30분 무렵 장꾼으로 가장한 채 동문시장에서 태극기를 꺼내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1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김재병 등 시위 주동자들을 따라 열을 지어 행진하려 하자 대구경찰서 소속 일제 경찰이 출동하여 폭력적으로 시위대를 해산하였다.

이때 김재병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았고,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재병은 1930년 4월 24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재병의 공적을 기려 201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