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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639
한자 朴萬俊
영어공식명칭 Park Manju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7년연표보기 - 박만준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8일 - 박만준 대구 서문시장 만세 시위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65년연표보기 - 박만준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2년연표보기 - 박만준 대통령표창 추서
거주|이주지 부상리 -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부상리
학교|수학지 성경학교 - 대구광역시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박만준(朴萬俊)[1897~1965]은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활동 사항]

박만준은 1897년에 태어났다. 평소에는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부상리에 거주하며 농사를 짓다가 농한기가 되면 대구 성경학교(聖經學校)에 등록하여 강습생으로 공부하였다.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에서는 3월 8일 서문시장에서 만세 시위를 열기로 계획하였고, 박만준을 비롯한 성경학교 강습생들도 참여를 결의하였다.

1919년 3월 8일 박만준은 성경학교 강습생 20여 명과 함께 서문시장으로 집결하였고, 오후 3시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 이만집(李萬執)의 연설과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金兌鍊)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계성학교·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반인들이 합세하여 시위 군중은 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서문시장을 나선 시위대는 대구경찰서와 종로를 거쳐 동성로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동성로에 있던 달성군청에 이르자 기관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일제 군경은 시위 군중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여 157명을 검거하고 그중 67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때 박만준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았고,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이 확정되었다. 박만준은 1965년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박만준의 공적을 기려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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