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3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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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錦城羅氏 |
영어의미역 | Geumseong Nasi | Geumseong Na Clan |
이칭/별칭 | 나주 나씨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부산광역시 |
집필자 | 김연지 |
나총례를 시조로 하고, 나경언을 입향조로 하는 부산 지역의 세거 성씨.
나씨(羅氏)는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로, 원래 중국 축융씨(祝融氏)의 후예인 운씨였는데 춘추 시대에 나(羅)에 봉해졌기 때문에 지명을 성으로 삼아 나씨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나씨는 문헌에 46본이 나타나 있지만 금성·나주·안정·군위·수성 등을 제외한 나머지는 상세히 알 수 없다. 그 중 안정·군위·수성 등은 금성 나씨에서 분적했다고 한다.
안정 나씨의 시조 나천서(羅天瑞)와 군위 나씨의 시조 나문서(羅文瑞)는 형제간으로 금성 나씨의 시조 나총례(羅聰禮)의 11세손이다. 고려 공민왕 때 나천서는 안정백(安定伯)에, 나문서는 적라백(赤羅伯)에 봉해져서 본관을 각각 안정과 군위로 하였고, 수성 나씨는 나총례의 14세손 나순직으로 들어올 때 둘째 아들 나광우(羅光佑)가 그곳에 남아 눌러 살았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수성으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 이들도 금성으로 통합했다고 하니, 오늘날 우리나라의 나씨는 나주 나씨와 금성 나씨로 대별된 셈이다.
시조 나총례는 고려 초에 삼한 공신으로 금성부원군(金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나총례의 선계는 당나라 태종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였던 나지강(羅至强)이다. 나지강은 고구려를 정복하자는 조정의 의견에 반대하고 우리나라에 망명하여 발라현(發羅縣)에 정착, 신라조에 벼슬하여 좌승상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나씨가 나주에 살게 되었으며, 신라 효공왕 때 그의 원손 나경(羅璥)이 나주사찬(羅州沙湌)에 봉해져서 본관을 나주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연대와 세계가 확실치 않고, 또 나주는 당나라 태종 때는 발라로 백제 땅이었고, 신라 효공왕 때는 금산 혹은 금성이라 하여 후백제 견훤(甄萱)의 치하에 있다가 903년(효공왕 7) 고려의 지배하에 들어감에 따라 비로소 나주로 개칭하게 된 점으로 보아 나지강이 신라에서 벼슬하였다는 사실과 나경이 나주사찬에 봉해졌다 함은 객관성이나 합리성이 부족하므로 연대와 세계가 확실한 나총례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나주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주에는 이 계통 외에 나부(羅富)를 시조로 하는 나주 나씨가 있어서 동본 이족(同本異族)이 같은 나주를 발원지로 삼게 되었다. 나부를 시조로 하는 나씨는 원래 여황 나씨였으나 고려 성종 때 여황현(艅艎縣)이 나주에 귀속되면서 나주로 개관하여 이족이면서도 본관을 같이 하여 수백 년을 살아왔으며, 나총례를 시조로 하는 나주 나씨는 영조 때 무신란의 화를 면하기 위해 나주의 옛 이름이 금성이고 또 시조가 금성부원군에 봉해졌음을 연유하여 금성으로 이관하였다.
정랑 나무송(羅茂松)[1577~1653]의 현손인 나경언(羅景彦)이 18세기 중후반 무렵에 동래부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
1937년 문기주(文錡周)가 편찬한 『동래군지』의 성씨조에는 금성 나씨가 우거(寓居) 성씨로 기록되어 있다. 2000년 인구 조사에서 금성 나씨는 461가구에 1,494명[남자 790명, 여자 704명]이 부산 지역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