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2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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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海女 |
영어의미역 | Female Diver |
이칭/별칭 | 잠녀,잠수,무레꾼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안미정 |
부산광역시 연안에서 바다 속에 자맥질하여 해산물을 채취하는 여자.
해녀는 「수산업법」상으로 보면 마을 어업의 종사자들이다. 해녀들의 어로 형태를 나잠(裸潛)이라 일컫는데, 그 의미는 기계 장비에 의존하는 스쿠버들과 다른 형태임을 말하고 있다. 즉 자신의 호흡에 의존하여 자맥질로 전복, 소라, 문어, 해삼, 성게 등을 채취하는 것이다. 이러한 어로는 한반도 동해·서해·남해 연안과 제주도에서 볼 수 있으나, 해녀들의 고령화와 더불어 점차 감소하고 있다.
해녀를 지칭하는 용어가 지역별로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가령 남해안에서는 ‘무레꾼’이라 하고, 제주도에서는 ‘잠녀·잠수[녀·수(潛女·潛嫂)]’로 불리어 왔다. 부산광역시 영도구의 하리항에서 만난 한 나잠업자는 1960년대 ‘통쟁이’라는 말로도 불리었다고 한다. 자맥질하는 도구 가운데 예전에는 부이 역할로 박[이를 ‘테왁’이라 부른다]이 쓰였는데, 그 대신 나무통을 사용하였던 데에서 따온 말이라 짐작된다. 그런데 이처럼 나무통을 사용하는 것은 일본의 아마[海女, 海士]에게서 볼 수 있는 있는 것으로 과거 일제 강점기에 영도에 있었던 이주 어촌의 영향이라 짐작해 보게 된다. 지금은 그 모습을 찾을 수 없고 모두 스티로폼을 이용해 부이로 사용하는 일반적 양상을 볼 수 있다.
부산의 해녀는 부산 출신의 해녀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출신지에 한정할 때 지금의 부산 해녀 문화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 부산은 일본과 한반도 타 지역으로부터 이주자가 많았던 것을 감안할 때, 부산의 해녀를 출신지 중심이 아니라 생활 공간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며, 이를 통해 현재 부산의 역사성과 해양성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되기도 한다. 현재 부산의 해녀는 부산 또는 한국의 여러 지역에서 이주해 온 여성들로 부산광역시에 살면서 나잠업을 생계의 주요 수단으로 하고 있는 어로자라 말할 수 있다.
해녀가 부산에 언제부터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일반적으로 한국의 해녀 역사와 더불어 전개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해녀들이 하는 어로법은 대체로 신석기 시대에 식량을 얻기 위해 행하였을 자맥질에서 유래되었다고 하겠으며, 패총에서 나온 유물들이 그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부산광역시 영도구의 동삼동 패총 전시관의 유물을 통해 신석기 시대 인류가 사냥과 고기잡이를 통해 식량을 확보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패총 연구에 따르면,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 패총에서 발견된 패종은 모두 53종으로 특히 홍합과 참굴, 소라 껍데기가 다량 발견되었다. 만입부(灣入部)[만의 안쪽]에 위치함에도 불구하고, 외해 암초성 패종이 22종을 구성하는 등, 이곳에서는 자맥질 혹은 낚시 등에 의한 적극적인 어로 활동이 있었다고 한다. 이외 부산광역시 송도, 영도구 영선동 유적 등 모든 유적에서 외해 암초성 패류들을 볼 수 있는데, 전반적으로 외해[심해]를 이용할 수 있는 어로 기술이 발달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선사 시대로부터 부산의 연안에서는 자맥질에 의한 식량 채취가 이뤄져 왔으며, 그 활동 또한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대의 해녀는 부산을 비롯하여 한반도 연안에 모두 분포하고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 제주도 출신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게다가 부산의 해녀들은 도심 가까이에서 어로 및 상거래를 한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그 이유는 식민지 수산 경제의 확장과 더불어 제주도의 여성들이 한반도를 비롯한 일본, 중국, 러시아 등지로 이동하게 된 데에 따른 결과이다.
당시 부산은 이들 여성들이 이동하는 주요 거점이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사회 경제적 이유가 있었다. 첫째, 부산에는 일본의 해조 상인과 객주들이 모여 있던 큰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이 시장의 수요에 의해 해녀들을 모집하고 인솔하기 위한 선주와 모집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부산이 주변 교통 체계에 있어 거점이었기 때문에 해녀들의 이동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셋째, 수산 시장의 수요를 불러일으킨 해초의 주요 서식지가 적조[쿠로시오]의 영향권 안에 있던 경상남도·경상북도 연안이었다. 당시에 가장 수요가 많고, 가격이 비쌌던 해조는 우뭇가사리로 식재료이기도 하지만, 일본 비단 산업에서 비단의 광택을 위한 원료로 사용되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해녀 노래」에서도 부산을 향해 노를 저어 갔던 상황을 연상할 수 있는데, 노랫말 속에는 이들이 경유해 갔던 지역들이 있어 더욱 주목해 볼 만하다. 「해녀 노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해녀 노래」
이여싸나 이여싸나/ 성산 일출 려 두곡/ 소완도로 가는구나/ 완도 지방 넘어가근/ 신기도영 넘어가곡/ 금당아로 넘어가근/ 저 큰 바당 다 지나곡/ 지누리대섬 넘어가근/ 나라도로 건당다/ 나라도를 넘어가곡/ 뽕돌 바당 지나본다/ 돌산을 넘어가근/ 솔치 바당 건너간다/ 솔치 바당 건너가민/ 남해로다 노양목/ 사랑도 바당 넘어간다/ 물파랑 것도 지나가근/ 제장심포 넘어가곡/ 가닥 동끗 지나가민/ 등바당을 넘어간다/ 다대끗을 넘어가민/ 부산 영도이로구나/ 이여싸나 이여싸나
거시적으로 보면, 일본의 수산 시장을 목적지로 한 한반도 주변 해역에서의 해녀 이동이 나타난 것이며, 당시 부산은 해초 및 여러 해산물의 거점 시장이자 해녀 이동의 거점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해산물의 경제적 수요에 따라 제주도 해녀들이 한반도로 이동하게 된 것은 1895년(고종 32)부터이며 그 곳이 현재 부산의 영도라는 설이 있다.
부산에는 일본의 여러 지역에서 건너온 어민들이 형성한 이주 어촌이 있었으며 이 어민들 가운데 해녀들도 있었다. 이주 어촌은 부산의 영도[1876년], 다대포[1906년]와 용당[1908년], 하단, 대변[1908년]에 있었다는 사실에 비춰 볼 때, 일제 강점기 이전부터 일본인 어민들이 부산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주 어촌은 일본의 지방 자치 단체 혹은 수산 단체에 의해 계획적으로 이주 어촌이 형성된 보조 이주 어촌과 사람들이 임의로 이주하여 자연 발생적으로 거주지가 형성된 자유 이주 어촌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분류는 이주자의 입장에 의한 것으로 이를 수용하는 측인 현지[당시 조선]의 분류와는 다를 수 있다. 영도와 하단의 경우에는 임의에 의한 이른바 자유 이주 어촌이 있었는데 특히 영도에 살았던 일본인 해녀들에 관한 자료를 토대로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영도에 이주 어촌이 있었던 것은 1876년(고종 13)이라고 하지만 그 규모와 위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일제 강점기 이전에 이미 영도에는 일본 어민들의 왕래가 있었음을 짐작케 해 준다. 일본 미에 현[三重縣] 남쪽 시마 시[志摩市]의 카타다[片田] 지역 어민들은 1899년(고종 36)부터 한반도로 출어를 시작하였다고 하며, 1915년과 1916년부터는 관부 연락선을 타고 부산의 영도를 오갔다. 처음에는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와 쓰시마 섬[對馬島]을 거쳐 부산을 목적지로 도항하였다.
한반도로의 출어는 부산 영도에서 출발하여 동해안을 거쳐 울릉도 및 각지에서 해산물을 채취하고, 영도에서 거제도 주변과 거문도를 거쳐 제주도로 가기도 하였다. 어기(漁期)가 끝나면 이들은 다시 영도로 노를 저어 돌아와 9월 말과 10월 초 사이 고향[카타다]으로 돌아갔다. 다음 해 봄이 되면 다시 영도로 돌아와 어업을 하는 것이다. 해녀들은 자신이 잡은 전복과 소라를 부산 안에서 행상을 하며 팔기도 하였고 또 영도에 있던 통조림 공장으로 보냈다고 한다.
이처럼 계절적으로 귀향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일가족이 함께 영도에서 거주한 경우도 있었다. 해녀처럼 해산물을 채취하는 경우만이 아니라 잠수 기구를 판매·수리하는 가게를 운영하고, 또 제주도에 그 출장소를 설립한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시마 시의 카타다 지역 출신의 해녀들이 영도에 거주한 기간은 정확하지 않으나 약 30여 년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식민지 시대 영도는 제주도 해녀들이 출어(出漁)를 위한 거점의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해녀들에게도 한반도 출어의 중요한 거점이자 일부 어민들의 정착지이기도 하였다.
한반도의 남동해에 있는 부산광역시는 해안선 길이가 306.2㎞로, 2011년 말을 기준으로 할 때, 전체 어업 가구가 2,393호에 수산업 종사자는 2만 3578명이다. 그리고 어촌계가 50개소 있으며, 그 가운데 마을 어업이 이뤄지고 있는 곳은 31개소이며 면적은 총 16.95㎢에 달한다. 이 바다를 어장으로 하여 해산물을 채취하고 있는 해녀는 낙동강 상류와 중구를 제외한 전 연안에 분포하고 있다. 지역별로 분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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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는 전국 시 단위 행정 구역 이상의 단위에서 제주도를 제외하고 해녀가 가장 많은 곳이다. 2005년 한국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부산광역시의 나잠 어업인, 곧 해녀는 476명이나 부산광역시에서 집계한 자료에는 2012년 1월 기준 964명의 해녀들이 있다.
이러한 수치의 차이는 나잠 어업인에 대한 분류의 차이 때문이다. 나잠 어업의 경우 은퇴의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비정기적으로 일할 수 있으며, 부산의 집계는 이러한 고령의 해녀들을 포함한 수치라 간주할 수 있다. 이러한 해녀를 관행 해녀라 하여 입어증을 소지하고 있는 입어 해녀와 다르게 분류한다. 따라서 입어 해녀처럼 법적으로 정해진 기간만큼 일하지는 않으나 때때로 바다 속으로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해녀들이 갑절가량 많다는 것이다. 이 해녀들을 연령에 따라 분류해 보면 표 ‘부산광역시 해녀의 연령 분류’와 같다.
부산의 해녀는 40대 미만의 젊은 층이 없는 가운데, 60대 이상의 해녀가 전체의 79.5%를 차지하여 고령화 현상이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고령화는 새로이 일을 하는 젊은 층의 유입이 없기 때문으로 자연히 해녀 인구가 감소하는 것과 더불어 가속화되고 있다. 2008년 1,059명이었던 해녀는 2009년 1,010명, 2010년 999명, 2011년 986명, 2012년 964명으로 감소하였다.
부산광역시는 8개 구·군에서 나잠 어업인 지원 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주로 잠수복 지원과 잠수병 치료 지원, 선진지 견학 등이다. 이러한 지원 사업은 나잠 어업의 지속화를 위한 기반 조성보다는 어업인의 후생 복지에 초점을 두고 있다. 나잠 어업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나잠 어업인의 육성이 필요하나 그러한 재생산을 불러일으키는 데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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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현재 해녀들의 어업 전망은 불투명한 상태이다. 현재 마을 어업에 의한 생산고는 다른 어법에 비해 낮고, 2차 가공 시설로의 연계가 미약하며, 어로 환경의 열악성 등이 나잠 어업에 대한 경제성을 더욱 약화시키고 있다. 부산광역시의 연안 환경이 생태적으로 더욱 풍부해지고 살아있는 해양 문화를 육성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전통적 어로에 대한 가치를 재고하고 현대적 재창출이 모색되어야 한다.
영도는 조선소와 수출입 항만 및 국제·국내 여객선 터미널이 있어 타지 사람들의 일시적 거주지와 정착지이자 외항선원 가족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기도 하다. 1920년대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방면으로 출어하던 제주도 해녀들은 일단 영도에서 체류하며 출어를 재준비하고 각자 행선지로 향하였다. 이러한 배경으로 영도는 일찍이 제주도 출신의 해녀들이 정착한 곳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영도의 해녀가 모두 제주도 출신의 여성들은 아니다. 거제도를 비롯하여 남해안 지역에서 이주해 온 해녀들이 영도에 정착한 사례들도 있고, 영도 현지 출신의 해녀들도 있다. 비율이 어느 정도인가는 정확히 집계된 바는 없으나, 제주도 출신의 해녀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다. 또한 영도에 정착하였던 해녀가 역내의 다른 곳[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으로 이주하는 사례들도 있다.
부산광역시의 해녀들은 자신이 채취한 해산물을 판매하는 등의 상업을 병행하는데, 이러한 양상은 자생적인 것으로 어업과 해산물 판매가 거의 동일한 장소에서 이뤄지는 특징이 있다. 물론 부산광역시 기장군과 같이 부산의 모든 지역의 일반적 특징이라 하기에는 한계가 있고, 일부 다른 도시에서도 그 양상을 볼 수 있으나 그럼에도 도심지 내의 해녀 소집단의 상업성은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이 바로 산지에서 소비될 수 있는 이유는 해녀들이 일하는 어장이 도시민들에게 있어서는 가까운 휴게와 여가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장소는 인근의 관광지와도 연결되어 해녀들은 시민과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여 해산물을 채취, 판매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부산광역시는 북항과 남항이라는 두 개의 큰 항구를 가진 수출입 항구 도시인데, 두 항을 나누는 분수령 역할을 하는 곳이 영도이다. 부산광역시 기장군을 제외하고 부산광역시 관내에서 해녀가 가장 많은 곳 또한 영도이다. 영도의 중리에는 일명 해녀촌이 있는데, 이곳은 해녀들이 일하는 9곳 중의 하나이다. 본래 취락이 있는 마을이 아님에도 이처럼 부르는 이유는 30여 명의 해녀들이 항시적으로 모여 생업을 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라 여겨진다. 영도 중리산 서남 방향 산자락 한쪽에 깎아지르듯 한 절벽 아래의 좁은 갯바위에 형성되어 있는 해녀촌은 해녀들이 바다 일[물질]을 준비하고 마무리하는 작업장이자 식당이기도 하다.
2인 1조가 되어 해산물을 팔기에 모두 32명이 해녀들이 운영하는 해녀촌은 16개의 해산물 가게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거의 동일한 해산물을 가지고 16개 가게가 판매한다는 것은 특별한 판매 전략이나 경쟁을 유발시키는데, 이들은 상호 순환적 판매 방식을 택해 가능한 모든 이익이 분배되도록 한다. 가령 이곳을 찾는 손님들을 순서대로 받는 등인데, 이러한 방식은 손님의 인원수에 따라 매상이 달라질 수 있고 손님이 그러한 순서를 지킬 리 없기에 해녀들 사이에 종종 고성이 오간다. 이곳에 해녀 촌이 형성된 것은 약 40년 전부터이다. 이곳에서 만난 60대의 한 해녀의 말은 어떻게 해녀촌이 형성되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처음엔 마 이렇게 장사도 심하게 안하고 그때는 이 앞에 전복이 바글바글하였어. 시장 같이 이렇게 장사 안 하였거든. 그래 그때는 시장가야 해삼……전복 따고 가서 시장 가서 팔고 그래 가지고 허다허다 보니까 손님이 한 사람 두 사람 오기 시작하니까 인자 그때부터 여기 앉아 죽치고 앉아 있는 거지. 바다 물이랑 우리가 이거 다 매립하였잖아. [중략] 그 때는 이렇게 번잡하지 않으니까 손님들이 안 오는 거라. 그래 가지고 이제 시장에 갔잖아. 한 사람 오고 두 사람 오고 하다 보니까 이제 점점 알려지고 이제 돌빠꾸[갯바위]에 앉아 가지고 또 까주고, 나머지는 또 시장 가고, 그래 가지고 한 사람 한 사람 손님이 점점 많아지는 기라.”
해녀촌은 어장이 있는 곳에 자연스럽게 생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배경을 보면 해녀촌은 어장을 상실한 해녀들이 밀려들어 온 곳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영도에는 남항동과 동삼동 두 개의 어촌계가 있고, 그 산하에 170명의 해녀들이 있다. 동삼동 어촌계는 2011년 말 기준 97명의 해녀들이 있었다. 그런데 해녀촌이 있는 곳은 동삼동 어촌계의 구역이나 이곳을 구성하고 있는 해녀들은 남항동 어촌계의 해녀들이다.
따라서 다른 마을의 어장에 들어가 어업을 하고 있는 셈인데, 때문에 두 어촌계 해녀들 사이에서 곧잘 마찰이 생기곤 하였던 곳이다. 해녀 촌의 남항동 어촌계 해녀들이 이처럼 동삼동 어촌계의 구역에서 일하게 된 것은 남항동 해녀들이 도시 개발[남항 대교 건설 및 기타]의 영향으로 어장이 축소되거나 사라짐으로써 인근 지역인 동삼동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었다.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은 남항동 어촌계 해녀들 32명은 동삼동 해녀들이 일하지 않은 빈 곳에 자리를 잡았으며, 반면 동삼동 어촌계의 해녀들은 태종대 등대 앞에서 해산물을 판매하고 상시화된 자신들의 작업 공간이 있어 분쟁의 긴장 속에 해녀들은 평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대도시 속에 자리하고 있는 해녀촌처럼 부산의 해녀들의 활동은 단지 나잠 어업에 한정되지 않으며, 대도시 소비와 경관의 이점 속에 상업 활동을 동반하여 이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