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0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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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鎭南亭-古典文學 |
영어의미역 | Classical Literature Singing Jinam-jeong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양리 |
조선 후기 부산의 진남정을 대상으로 지은 한시 작품.
진남정(鎭南亭)은 다대포성 내에 있었던 정자이다.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있던 진남정은 1730년 6월에 중수되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소실되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동래 부사를 비롯하여 접위관(接慰官), 순무어사(巡撫御使) 등이 부산에 들렀을 때 진남정에 올라서 정자를 비롯한 주변 경관을 읊은 시가 세 편이 남아 있다.
1. 이복의 시
소소문다대(少小聞多大)[젊어서 다대에 대해 들어보았는데]
금래자세간(今來仔細看)[지금 와서 자세히 보노라]
개귀천하수(皆歸天下水)[모든 것이 천하의 물로 돌아가니]
부진해중산(不盡海中山)[바다 가운데 산은 다함이 없다]
용작선쌍도(龍雀船雙道)[용작(龍雀)을 그린 배는 두 길이요]
단청옥수간(丹靑屋數間)[단청을 칠한 집은 몇 간이네]
주인유객고(主人留客苦)[주인은 객고를 생각하여 만류하는데]
음사주단란(飮射做團欒)[술 마시고 활 쏘며 친밀하게 노니는구려].
이 시는 이복(李馥)[1625~1688]이 1680년 여름에 진남정에 대하여 읊은 작품이다. 이복은 1676년(숙종 2) 동래 부사로 부임하였다가 3년 만기를 채우고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진출하였다. 이 시는 경신년 1680년(숙종 6)에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주인은 객고를 생각하여 만류하는데”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서울로 돌아가기 직전에 진남정에서 신임 동래 부사와 연회를 하며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진남정의 위치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용작을 그린 배는 두 길이요, 단청을 칠한 집은 몇 간이네”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진남정에서는 멀리 바다와 그 바다 위의 배가 훤히 내려다보인 것을 알 수 있다.
2. 최종주의 시
남래관람종감과(南來觀覽縱堪誇)[남쪽에 와서 늘어선 자랑거리들을 관람하니]
안마기여만리하(鞍馬其如万里遐)[말안장을 얹던 곳과는 만 리로 멀어졌구나]
삼도파성훤의침(三島波聲喧倚枕)[삼도(三島)의 파도 소리 시끄러워 베개에 기대었더니]
백만운기요정거(百蠻雲氣繞停車)[백만(百蠻)[남쪽 오랑캐]의 운기(雲氣)가 감싸 수레를 멈추는구나]
향수화수혼성몽(鄕愁和睡渾成夢)[고향 생각은 잠과 어우러져 꿈을 이루니]
객빈봉춘반욕화(客鬂逢春半欲華)[객의 귀밑 터럭은 봄을 만나 반쯤 하얗게 되려 하네]
명일등대간출일(明日登臺看出日)[밝은 날 높은 대에 올라 해 돋는 것을 보리니]
일변귀사전응가(日邊歸思轉應加)[해 돋는 변방이라 고향 돌아갈 생각은 응당 더하겠지].
최종주(崔宗周)[1683~1737]는 1717년(숙종 43)과 1737년(영조 13) 두 차례 접위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시는 1737년 접위관으로 동래에 왔을 때 지은 작품이다. 이 시에서는 임무를 맡은 벼슬아치로서의 마음가짐과 함께 나이든 몸으로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오게 된 괴로움이 동시에 드러나 있다. 특히 “해 돋는 변방이라 고향 돌아갈 생각은 응당 더하겠지.”라는 마지막 구절은 나그네의 괴로움이 잘 드러난다고 하겠다. 이는 앞서 살핀 이복의 시에 나타난 “술 마시고 활 쏘며 친밀하게 노니는구려.”의 내용과는 상반된다. 이복의 경우 부사의 직을 무사히 마치고 서울로 가면서 진남정에 들렸고, 최종주의 경우 접위관으로 동래에 내려와 진남정에 들렀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3. 유수의 시
승륜북궐향남주(承綸北闕向南州)[북쪽 대궐에서 왕명 받들고 남쪽 고을로 향하였는데]
출역행장임현유(出役行藏任顯幽)[어사로 맡은 일 나섬과 숨음에서 현달과 유폐가 달려 있구나]
우리운하임소도(雨裏雲霞臨小島)[비 오는 가운데 구름과 노을은 작은 섬에 임하였는데]
악중규화핍양주(幄中規畫乏良籌)[장막 중에서 계략을 세움에 좋은 대책이 나질 않네]
충파화함삼성각(衝波畵艦三聲角)[파도와 충돌하는 화려한 전함에서는 호각 소리 세 번 울리고]
요석홍장백척루(繞席紅粧百尺樓)[좌석을 휘감은 붉은 단장은 백 척의 누각에 있구나]
다사주인유객의(多謝主人留客意)[주인이 객을 만류하는 뜻은 감사하나]
동산하독천풍류(東山何獨擅風流)[동산은 어찌하여 혼자서 풍류를 마음껏 즐기는가].
이는 유수(柳綏)[1678~?]가 1723년(경종 3) 삼남 순무어사로 파견되어 동래에 왔다가 진남정에 올라 노래한 시이다. 산으로 온 유수는 “어사로 맡은 일 나섬과 숨음에서 현달과 유폐가 달려 있구나.”라며 자신의 태도를 정하였으나 “장막 중에서 계략을 세움에 좋은 대책이 나질 않네.”라며 괴로움을 토로하고 있다. 이러한 객고를 위로해 준 것이 아마도 진남정에서의 풍류였던 것으로 보인다. “파도와 충돌하는 화려한 전함에서는 호각 소리 세 번 울리고, 좌석을 휘감은 붉은 단장은 백 척의 누각에 있구나.”라는 구절을 통해 진남정에서 보이는 바다 풍경과 당시 붉은 단장으로 장식된 정자의 아름다움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진남정은 현재 소실되어 그 형태를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남겨진 고전 문학을 통해 당시 진남정이 부산 지역에서도 유명한 누각이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특히 이들 시 속에 풍류를 즐겼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임무를 맡아 동래로 내려오는 관인들이 즐기던 연회의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