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협정 반대 투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776
한자 韓日協定反對鬪爭
영어의미역 Anti-Korea-Japan Agreement Struggl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광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학생 운동
관련인물/단체 동아대학교|부산대학교|부경대학교|부산교육대학교|경성대학교|부산남고등학교|부산상업고등학교|혜화여자고등학교
발생|시작 시기/일시 1964년 3월 25일연표보기 - 동아대학교 ‘한일 굴욕 외교 반대를 위한 성토대회’ 개최
종결 시기/일시 1965년 8월 14일연표보기 - 한일 협정 국회 비준
발단 시기/일시 1964년 3월 - 부산 시내 5개 대학 연대 투쟁 계획
전개 시기/일시 1964년 3월 26일 - 부산대학교, 부산남고등학교, 부산상업고등학교 학생 가두시위 전개
전개 시기/일시 1964년 3월 27일 - 혜화여자고등학교 학생 가두시위 전개
전개 시기/일시 1964년 4월 19일 - 5개 대학 학생회 ‘학원 사찰 규탄과 굴욕 외교 반대 성토대회’ 개최
전개 시기/일시 1964년 6월 4일 - 동아대학교, 부산대학교 가두시위 전개
전개 시기/일시 1964년 6월 8일 - 동아대학교 가두시위 전개
전개 시기/일시 1965년 6월 22일 - 한일 협정 조인
발생|시작 장소 동아대학교 -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 1지도보기
종결 장소 국회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 1

[정의]

1964년 굴욕적인 한일 협정을 반대하며, 부산 지역에서 전개된 학생 운동.

[역사적 배경]

1964년 봄 박정희 군사 정권이 한일 협정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민적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이는 식민 통치에 대한 일본의 책임 있는 사과와 배상을 바라는 대다수 국민 여론과 달리, 경제적인 지원에 초점을 둔 굴욕적인 대일 외교의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여론을 바탕으로 1964년 3월 6일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학생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본격적인 투쟁이 전개되었다.

[경과]

부산에서도 1964년 3월 동아대학교, 부산대학교, 수산대학교[현 부경대학교], 교육대학교, 한성여자대학교[현 경성대학교] 학생 대표가 모여 서울과 연계하는 연대 투쟁을 계획하였다. 그 결과 3월 25일 동아대학교 학생들은 총학생회의 주도로 ‘한일 굴욕 외교 반대를 위한 성토대회’를 개최하고, “매국 회담을 중지하라”, “이완용을 또 다시 만들지 말라”는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3,000여 명의 시위대가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다음날인 3월 26일 부산대학교 학생 3,000여 명도 “400만 어민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3억 달러의 채권 청산이라는 명목으로 흥정하려는 대일 굴욕 외교를 즉각 중지하라”는 경고문을 낭독하고, “김·오히라 메모를 공개하라”, “일본 상사의 경제 침투는 간접 침략이다”는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날 부산남고등학교 학생 1,000여 명, 부산상업고등학교 학생 1,000여 명도 데모에 나서 시가행진을 전개하였으며, 27일에는 혜화여자고등학교 학생 1,500여 명이 “우리는 한일 굴욕 외교를 반대한다”는 결의문을 작성하고 역시 시가행진에 돌입하였다.

4월 19일에는 4·19 혁명 기념식이 끝난 후 시내 5개 대학 학생회가 ‘학원 사찰 규탄과 굴욕 외교 반대 성토대회’를 개최하고, 동아대학교 학생 500여 명은 부산시청 앞에서 연좌데모를 벌였다. 이런 가운데 학생들의 시위는 굴욕적인 한일 회담 반대에서 반(反)정부 투쟁으로 성격이 바뀌었으며, 한일 회담 저지와 반정부 투쟁은 6월 3일 정점에 이르렀다.

부산에서는 6월 4일 동아대학교부산대학교 학생들이 경찰의 저지를 투석으로 뚫고 가두시위 끝에 부산시청 앞에서 연좌데모를 벌였다. 6월 8일 동아대학교 학생들은 교정에서 경찰의 폭력적 저지를 뚫고 가두로 진출하여 시민들과 함께 연합 시위를 감행하였다. 이날 시위대는 부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서부산경찰서를 완전히 파괴하고 시청 앞까지 행진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 선포와 휴교령을 통해 반대 목소리를 탄압하고, 1965년 6월 22일 한일 협정을 조인하였다.

22일을 즈음하여 서울과 부산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의 대학가는 격동하고 있었으며, 이를 억누르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휴교 조치를 취하였다. 부산에서는 21일 동아대학교가, 22일 부산대학교가 휴교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이날 부산대학교, 동아대학교 학생들의 반대 시위와 성토대회 등 반대 투쟁이 전개된 것을 비롯하여 전국 대도시에서 대학생과 일부 고등학생의 한일 회담 반대 투쟁이 이어졌다. 이런 가운데 집권 공화당은 8월 14일 야당을 배제한 채 단독으로 국회 비준을 자행하였다.

[결과]

한일 협정 반대 투쟁과 국회 비준 반대 운동을 주도한 주동자들과 시위에 참여한 많은 학생들이 경찰에 의해 연행되고, 이후 구속되거나 수배 조치를 당하였다. 이후 부산 지역의 학생 운동은 장기간 소강상태를 맞이하였다.

[의의와 평가]

한일 협정 반대 투쟁에서 부산 지역의 학생들은 전국적 연대를 통하여 반대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러한 연대 투쟁의 경험은 이후의 학생 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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