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3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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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大鳳 |
영어음역 | Gim Daebong |
이칭/별칭 | 포백(抱白)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훈 |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작가이자 의사.
김대봉(金大鳳)[1908~1943]은 1908년 2월 11일 경상남도 김해군 김해읍 북내동[현 경상남도 김해시 회현동]에서 태어났다. 1922년 김해보통학교[현 동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부산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에 입학, 1925년 7월 10일 전교생이 함께한 ‘동래고보생 맹휴’에 참가하였고, 1928년 3월 5일 졸업하였다. 소설가 요산(樂山) 김정한(金廷漢)이 동창이다. 김대봉은 동래고등보통학교 5학년 때인 1927년 9월 13일 『조선 일보』에 「농부의 노래」를 기고하면서 ‘포백(抱白)’이라는 호를 처음 사용하였다.
1929년 3월 평양의학전문학교 전신인 평양의학강습소에 입학하여 1933년 2월 졸업하고 이듬해 경성의 외과의원에서 근무하였다. 1935년 고향으로 돌아와 김해읍에 의원을 열었고, 1936년 2월 부산에 가까운 명지리[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로 옮겨 개원하였다. 1938년 5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 의원 정형외과에서 잠시 근무한 뒤 중앙의원을 열었다. 그해 6월 시 동인지 『맥』 창간에 참여하였다. 1939년 2월 경성제국대학 부속 병원 송정외과(松井外科)로 옮겨 근무하던 중 1943년 3월 환자로부터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다.
김대봉의 작품은 대부분 나라를 잃은 시기의 암담한 현실과 나약한 지식인의 고뇌, 여기에서 기인하는 개인의 구체적인 현실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서정 주체의 비애와 소망을 함께 보여 준다. 1927년 9월 13일 『조선 일보』에 「농부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시집으로 『무심』[맥사, 1938]이 있다. 1932년 3월 『신동아』에 소설 「연애의 결산」을 발표하였고, 「신흥 동요에 대한 편견」[『조선 일보』, 1931. 11]이라는 제목의 문학 비평도 썼다. 그 밖에 『동아 일보』에 의학 칼럼 「고칠 수 없는 줄 알었던 곱추는 어떤 병인가」, 「결핵의 일광 요법」, 「동통론」을 연재하였다. 1938년 3월 의학 대중화를 목표로 한 잡지 『대중 의학』의 편집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