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4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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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永植 |
영어음역 | Hong Yeongsi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743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공태도 |
현대 부산 기장 출신의 교육자 겸 향토사가.
본관은 남양(南陽). 아버지는 기장향교의 장의(掌儀)를 지낸 홍순영(洪淳榮)이고, 고모부는 기장 현감을 지낸 이해륜(李海崙)이다. 딸은 홍보애(洪寶愛)[1929년생]이고, 장남은 홍성수(洪性守)[1931년생]이다.
홍영식(洪永植)[1907~1988]은 1907년 경상남도 동래군 기장면 죽성리[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에서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신동으로 불리면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1924년 서울의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이 시기에 동양·서양의 고전을 섭렵하였으며, 당시 유행하던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심취하여 이기영(李箕永), 이태준(李泰俊) 등과 교류하였다. 5학년 때인 1930년 3월 10일 광주 학생 운동에 간여한 주동자로 낙인되어 퇴학당했다. 1933년에는 조선어학회가 개최한 한글 맞춤법 강습회에 참석하여 공부를 하였다.
1933년 무렵부터 1943년까지 방학 때마다 고향인 기장에 내려가 마을 청년들에게 국어와 국사 강의를 하였다. 홍영식은 국사를 가르쳤다는 죄목으로 경찰에 잡혀가 10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44년 동래군 기장면 대라리[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대라리]로 이사하였다. 이때 동래중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조카 박지홍(朴智弘)[전 부산대학교 교수]을 불러 “왜놈 교육은 받을 필요가 없다”고 설득하여 학교를 그만두게 한 일화가 전한다.
1945년 광복 이후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향토사 연구에 전념하였다. 1945년 10월~1950년 5월 경남여자중학교 교사, 1950년 6월~1962년 7월에는 부산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홍영식은 1988년 10월 4일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초읍동 장남의 집에서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부산고등학교 교사 시절 향토사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기장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기장읍지(機張邑誌)』를 강의하고 『동래부지(東萊附紙)』를 번역하였으며, 「차성가(車城歌)」를 풀이하였다. 1951년 『고시조 정해(古時調精解)』[신생사]를 펴냈다. 1957년 『국어국문학 사전』[허웅·박지홍, 일지사]을 편찬할 때 월북 작가 부분을 집필하였으나 출판사의 사정으로 글이 실리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의 교정본 원고가 남아 있어 현대 문학에 대한 홍영식의 해박한 지식을 엿볼 수 있다.
홍영식의 묘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763번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