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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구의 세거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7324
한자 沙上區-世居地
영어의미역 Residential Place in Sasang-gu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사상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현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씨 세거지 부산광역시 사상구

[정의]

부산광역시 사상구에 있는 성씨 세거지.

[변천]

사상구 지역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모라동 조개더미학장동 조개더미 흔적, 김해식 토기 파편 등이나 북구 금곡동 율리 조개더미와 알터 바위 등 낙동강 유역의 유적 및 유물들을 살펴볼 때 삼한 시대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대부분 본관과 성을 가지게 된 것은 고려 시기라고 한다. 사상 지역에 어떤 성씨 집단이 살았는지의 구체적인 사실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전기까지 이곳에 세거한 성씨 집단은 기록상 찾기 어려우나, 임진왜란 이전에 여러 성씨가 세거한 내용이 일부 성씨의 족보 기록에 나타나며, 대개가 임진왜란 이후 주로 김해, 양산, 밀양, 기장, 동래, 사하, 동평 등지에서 이거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인 1600년대로 들어오면서 처음으로 동계(洞稧)[구인계(九人稧)]가 발족되고, 구동계(舊洞稧)나 연구계(戀舊稧)의 명칭으로 불린 동계 향안(鄕案)에 1600년(선조 33)부터 1910년(순종 4)까지 약 300년간 900여 명이 수록되어 있어 17세기 이후 사상에 어떤 성씨 집단이 거주하였는지 알 수 있다. 남아 있는 향안 기록을 보면 당시 사상 지역에는 43성이 있었다. 그중 토착 성씨로 볼 수 있는 것이 김씨·이씨·박씨·최씨·황씨·조씨·문씨·정씨·허씨·서씨·구씨·강씨·정씨·송씨·배씨 등으로, 이들 토착 성씨는 향반으로 자처하며 면 행정과 동계의 향임을 번갈아 가면서 지역 행정을 비롯한 대소사를 관장한 것으로 보인다. 사상계의 동계는 1601년(선조 34)에서 1910년까지 모두 908명의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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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계 동계에 수록된 계원을 성씨별로 세분해 보면, 1601년에서 1629년(인조 7)까지 입향한 성씨는 모두 16개로, 황씨(黃氏)[8호], 김씨(金氏)[7호], 구씨(具氏)[7호], 최씨(崔氏)[6호], 박씨(朴氏)[5호], 정씨(丁氏)[5호], 서씨(徐氏)[5호], 이씨(李氏)[4호], 조씨(趙氏)[3호], 허씨(許氏)[3호], 문씨(文氏)[2호], 강씨(姜氏)[2호], 방씨(方氏)[2호], 정씨(鄭氏)[1호], 손씨(孫氏)[1호] 등이다.

위에서 보인 성씨라도 위세가 두드러진 집안보다는 대부분 농민층과 중인층이었다. 즉 이는 대부분 19세기에서 20세기에 신간된 족보를 이들이 소장하고 있고, 호구장적, 교지, 첩지, 전지 등을 소장하고 있는 집안도 드물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사상 지역에서 오래된 세거 성씨로는 김씨, 박씨, 최씨, 황씨, 문씨, 조씨, 송씨, 배씨 등이다. 또 괘법동경주 이씨(慶州李氏), 주례동경주 이씨, 전주 이씨(全州李氏), 모라동경주 이씨, 감전동경주 이씨, 엄궁동경주 이씨와 성주 이씨(星州李氏) 등이 있으나 호수가 적고 지금은 거의 몇 가구만 대를 이어 가고 있다. 1904년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의 사상 지역 성씨 분포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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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조선의 성(姓)』[1934]에 나타난 성씨 분포도이다. 이 자료는 앞의 자료와 달리 본관까지 제시되어 있어 세거지 상황을 더욱 자세히 알 수 있다. 당시 동래 지역에 존재하던 45개 지역의 집성촌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집성촌은 1개 동리에 15가구 이상이 거주하는 지역을 전수 조사하여 기록한 것으로, 당시 이 지역의 인구 분포 및 세거 성씨를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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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사상 지역에 분포한 세거 성씨는 위의 표에서 나타나듯 밀양 박씨(密陽朴氏), 김해 김씨(金海金氏), 김녕 김씨(金寧金氏), 창원 황씨(昌原黃氏), 영산 신씨(靈山辛氏), 경주 최씨(慶州崔氏), 여산 송씨(礪山宋氏) 등이다. 이러한 세거 성씨는 해방 이후 사상 지역 변화 발전에 따라 많은 이합집산이 있었다. 아래의 표는 1990년까지의 사상 지역 세거 성씨에 관한 현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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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황]

현재 세거하는 성씨 현황에 대해 살펴보기 위하여 먼저 세거 성씨의 입향 경위를 보면 다음과 같다. 학장동의 영산 신씨와 밀양 박씨는 이들이 박신 마을을 이루고 있을 정도로 박씨와 신씨가 사이좋게 살았다. 밀양 박씨 입향조인 박한방(朴漢芳)이 입향한 지 100여 년 후 영산 신씨 신치종(辛致宗)이 입향하였다. 신치종은 초읍에서 이 마을로 이사 왔으며, 그가 박씨 가문과 혼인함으로써 두 가문의 친교가 시작되어 양쪽 집안은 지금까지도 그 유대를 이어 오고 있다.

주례동여산 송씨는 조선 시대 세조(世祖)의 찬탈을 반대하여 관직을 버리고 단양을 거쳐 동래로 낙향한 집안이었다. 이들 집안의 후손인 송계방(宋啓邦)이 임진왜란 이후 주례동에 정착하였다. 창원 황씨는 임진왜란 이후 창원에서 사상으로 옮겨왔는데 괘법동창원 황씨 입향조는 황영숙(黃永淑)이다. 사상 향안에 범 황씨 81명이 기재될 정도로 사상 지역에서는 대성을 이루었다. 괘법동의 황씨는 자신들이 이주한 곳의 옛 지명인 창법(昌法)을 따서 창법계(昌法契)란 동계(洞契)를 400여 년간 운영하고 있다.

각 세거 성씨를 동별로 알아보자. 삼락동은 옛날 삼각주의 유두 시절 조선 중엽 김녕 김씨들이 이 섬을 개간하여 터전을 마련하여 살았다. 이어서 의춘 방씨, 안동 권씨(安東權氏), 밀양 박씨, 김해 김씨 등이 살았다. 모라동김녕 김씨, 밀양 박씨, 달성 서씨(達成徐氏) 등 세 문중이 살았다. 이 가문들은 임진왜란 이전 이 마을에 정착한 성씨로 보고 있으며, 그 외 경주 이씨, 김해 배씨(金海裵氏), 김해 김씨, 경주 최씨, 진주 강씨(晉州姜氏) 등이 살았다.

덕포동에는 창원 구씨(昌原具氏), 김해 김씨 등이 오래된 성씨이나, 창원 구씨 자손들은 조선 후기 동래 북면 감동으로 떠나고 뒤이어 창원 황씨, 평해 황씨(平海黃氏), 밀양 박씨, 밀양 손씨(密陽孫氏), 경주 이씨 등이 살았으며 파평 윤씨와 진주 정씨[晉陽鄭氏] 등은 감동으로 이거하였다.

괘법동에는 임진왜란 이전 창원 황씨, 김해 허씨(金海許氏), 압해 정씨(狎海丁氏), 경주 이씨 등이 살았다. 그 뒤로 김해 김씨, 분성 배씨(盆城裵氏), 인동 장씨(仁同張氏), 수원 백씨(水原白氏), 충주 지씨(忠州池氏) 또한 터전을 마련하였다. 임진왜란 이전에 살았던 창원 황씨는 다 떠나고 지금의 황씨는 임진왜란 이후에 정착한 가문이다. 압해 정씨 또한 모두 떠나고 없다. 영양 천씨(潁陽千氏), 함안 조씨(咸安趙氏) 등도 살았으나 현재는 거주하지 않는다.

감전동에는 임진왜란 이전 이곳에 터전을 마련하고 정착한 창원 황씨, 함안 조씨 등이 살았고 뒤이어 옥산 전씨(玉山全氏), 김해 김씨, 창원 구씨, 경주 이씨, 경주 최씨, 진주 정씨(晉陽鄭氏), 광주 김씨(光州金氏), 진주 강씨, 인동 장씨, 청주 한씨(淸州韓氏) 등이 살았다. 지금은 다 떠나고 겨우 한두 집만 세거한다. 함안 조씨, 창원 구씨가 이곳에 재실을 건립하고 조상의 향제를 받들고 있다.

주례동은 산지가 넓고 마을이 크고 농토가 많아 옛날부터 많은 성씨가 터전을 마련하고 살았다. 그중 토착 성씨는 남평 문씨, 함안 조씨, 여산 송씨, 경주 최씨, 경주 이씨, 남원 양씨(南原梁氏), 분성 배씨, 동래 정씨, 밀양 박씨, 김해 김씨, 해주 오씨(海州吳氏), 전주 이씨 등이다. 지금도 이들 문중 후손들이 몇 가구 세거하고 있다. 이곳에는 여산 송씨, 경주 최씨, 분성 배씨, 해주 오씨 등이 각각 재실과 사우를 가지고 있다.

학장동에 임진왜란 전후 어떤 성씨가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구덕리에 살았던 진주 강씨가 있다. 17세기 후반 밀양 박씨 가문이 정착하고 뒤이어 18세기 영산 신씨(靈山辛氏)가 정착하면서 한때는 학장동의 박신 마을이라고 할 정도로 박씨와 신씨가 많이 살았다. 뒤이어 경주 최씨, 파주 염씨(坡州廉氏), 김해 김씨 등이 자리 잡고 살았으며 지금도 재실과 사우를 건립하여 향제를 지내고 있다.

엄궁동김해 김씨, 경주 이씨가 세거하였으나 그 수는 매우 적었다. 또 학장동에서 건너온 밀양 박씨가 있었고, 사하구 하단동에서 이거한 창원 황씨, 성주 이씨가 살았다. 성주 이씨 문중은 이 참봉이 이곳에서 객주를 개설하여 엄광 나루에 소금배와 미곡선이 드나들고 많은 상인이 내왕하였다.

사상 지역에서 충렬사에 배향된 인물로는 주례동여산 송씨의 선대 조상인 동래 24충의 한 사람인 송남생, 학장동밀양 박씨 직계 선조인 동래 24충의 박인수, 모라동밀양 박씨로 동래 66충의 한 사람인 박귀희, 덕포동창원 구씨인 66충의 한 사람인 구영취 등이다. 그 외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선무 원종공신록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 10여 명이나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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