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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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改新敎 |
영어의미역 | Protestantism |
이칭/별칭 | 신교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이상규 1 |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
[개설]
개신교(改新敎)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기원 30년 무렵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기독교의 한 지류로서, 16세기 종교 개혁 이후 형성되었다. 개신교는 인간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강조하는 종파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인류를 향한 보편적 사랑의 실천을 강조한다. 16세기 이후 천주교와 더불어 기독교의 대표적인 한 지류를 형성하고 있으며, 18세기 이후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확산되었고, 188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었다.
한국의 개신교[기독교] 전파는 크게 두 가지 경로로 이루어진다. 첫째는 중국 대륙과 만주를 거쳐 의주 등 변방으로 전래되는 것이고, 둘째는 홍콩과 일본을 거쳐 부산항을 통한 접촉이었다. 1880년대 미국과 호주 등 선교사가 정식으로 입국하기 이전까지는 주로 만주 지방을 거쳐 의주 등 이북 지방을 통하여 기독교가 전래되었다. 1880년대 이후는 거의 대부분의 선교사가 일본 시모노세끼를 거쳐 부산으로 입항하였다. 이 점에서는 미국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G. Underwood)[元杜尤, 1859~1916], 아펜젤러(H.G. Appenzeller)[1858~1902], 윌리엄 베어드(W.M. Baird)[1862~1931] 등과 호주의 조셉 헨리 데이비스(J.H. Davies)[1856~1890], 존 멕카이(J.H. Mackay), 앤드류 아담슨(A. Adamson) 등의 선교사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산 지방 최초로 기독교가 전파된 것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성경 반포 사업으로부터 비롯되었다. 1883년(고종 20) 일본인 나가사카를 부산에 파견하여 성경 반포 사업을 실시하였는데, 1886년(고종 23)까지 지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2,000권의 성경을 반포하였고, 1884년(고종 21)에는 톰슨(J.A. Thompson)이 조선에 성경 보급소를 설치할 목적으로 부산에 오기도 하였다.
[변천]
1. 개항기
한국에 있어서 개신교 선교사의 정식 입국은 1884년 9월 20일 알렌(H. N. Allen)[1858~1932]으로부터 시작된다. 물론 이때도 알렌이 부산을 경유하였기 때문에 그가 부산에 어떠한 영향을 끼친 것인지 잘 알 수는 없다. 정식으로 부산에 선교사 파견이 시작된 것은 1885년(고종 22)이다. 중국 복주(福州)에서 선교하던 영국 성공회 계통으로 영국교회 선교회 소속의 존 월푸(John R. Wolfe)[1832~1915] 주교와 2명의 중국인 전도자가 함께 부산에 왔다. 영국교회 선교회는 1799년(정조 23) 창립된 복음적인 선교 단체로, 특히 인도·중국 등지에 많은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월푸의 활동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는 부산 지방에서 호주 장로교 선교의 길을 안내한 인물이었다.
부산에서 선교했던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는 1889년(고종 26) 7월 부산에 온 캐나다인 제임스 스카트 게일(James Scarth Gale)[1863~1937]이었다. 이때부터 1891년(고종 28) 봄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 이적할 때까지 1년 반 동안 부산에서 일했다.
이후 이어서 부산에 들어온 인물이 바로 호주 장로교가 파송한 한국 선교사이자 부산·경상남도 지방을 담당한 조셉 헨리 데이비스였다. 그는 중국 복주 지방에서 선교하던 영국교회 선교회 소속 월푸의 한국 선교에 대한 호소를 듣고 자원해서 그의 누이 메리 데이비스(Mary T. Davies)[1853~1891]와 함께 들어왔다. 1889년 10월 2일 부산항에 입항하여 부산을 둘러본 뒤 10월 4일 인천, 서울에 도착하였다. 서울 지방에는 이미 많은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어 데이비스는 누이를 서울에 두고 부산 지방으로 내려갔다. 그것은 이곳이 한국의 대표적 항구 도시이며, 일본과 인접하여 보다 효과적인 선교가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부산에 내려오는 동안 무리한 도보 여행과 천연두의 감염으로 부산 도착 다음날인 1890년(고종 27) 4월 5일에 사망하였다. 당시 부산의 선교사였던 게일이 데이비스의 시신을 영선동 뒷산에 매장하였는데, 이곳이 후일 호주 장로교의 부산 선교를 위한 약속의 땅이 되었다. 데이비스의 죽음은 향후 호주 장로교의 한국 선교를 더욱 부채질해 주었다.
또 한편으로 데이비스의 죽음 이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월리엄 베어드와 애니 베어드(Annie L. Baird)[1864~1916] 부부가 부산을 찾아왔다. 1890년 당시 부산·경상남도 지방에는 15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북장로교 선교부는 서울 다음으로 부산·경상남도 지방의 선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부산에 선교 거점을 마련하였다. 1891년 1월 29일 부산에 도착한 베어드 부부는 서울로 상경하여 연례 회의에 참석하였다. 1891년 2월 3일 베어드는 공식적으로 부산 선교사로 임명되자, 9월 미국영사관의 협조로 부산항에서 멀지 않은 영선현(瀛仙峴)에 선교 부지를 매입하였다. 북장로교가 매입한 이곳이 후일 초량교회가 태동한 곳이다. 베어드는 초기 선교 활동을 한 서상륜과 함께 순회 전도 사업을 전개하였다. 베어드가 개척한 지역은 김해, 진주, 울산, 동래, 밀양, 대구, 상주, 경주, 안동 등 경상도 지방과 전주, 목포, 광주 등 전라도 지방이었다.
1893년(고종 30) 무렵에 이미 영선현[영선 고개, 영주동, 초량 일부 지역]과 부산진[범일동, 좌천동]은 부산 지역 선교의 중심지였다. 즉 영선현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중심지였고, 부산진은 호주 장로교 선교부의 중요한 근원지였다.
북장로교 선교사로 두 번째로 부임한 사람은 휴 브라운(H.M. Brown)이었다. 베어드의 요청으로 부임한 그는 첫 의료 선교사의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이후 몇몇의 선교사가 내한하였으나 1914년 선교 지역 조정에 따라 부산·경상남도 지역에서 철수하였다. 즉 1891년에서 1914년까지 북장로교 선교사는 21명이 부임하여 부산에서 활동하였다.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호주 장로교 선교사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선교 지역의 정리는 한국에 선교사가 들어오면서부터 문제가 되었던 부분이었다. 같은 지역에서 여러 선교부가 활동하게 되자 이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장로교 선교부들은 1889년(고종 26)에 연합하여 미국의 선교부들과 호주의 빅토리아 교회들이 연합체를 형성하였다. 처음 여기에 가입한 선교회는 북장로교와 호주 선교부였다. 그러나 호주의 데이비스 목사가 사망하자 이 연합회는 중단되었다. 그 후 1892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들어오게 되자 새로 연합체가 조직되어, 1893년(고종 30) 1월 28일에 장로회 정치를 채용하는 선교회, 곧 장로교 공의회가 조직되었다. 이를 선교사 공의회라고도 한다. 북장로회와 호주 선교부가 모두 부산을 근거지로 선교 사업을 하였는데, 공의회에서 상의한 결과 낙동강 이남은 호주 선교부가 사업하고, 낙동강 이북은 북장로회 선교부가 맡아서 하기로 하였다.
1892년 북장로회 선교부와 감리교 선교부가 상의한 결과 5,000명 이상의 인구가 있는 도시에서는 두 선교부가 다 선교 사업을 할 수 있고, 작은 도시에서는 이미 그 곳을 개척한 선교부가 계속하여 선교 사업을 하기로 약속하였다. 1908년에는 장로교 선교부 간에 선교 사업의 중복과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선교 지역을 배정하였다. 호주 선교부가 경상남도, 캐나다 선교부는 함경도, 남장로교는 전라도, 북장로교는 그 이외의 지역에서 전도하고, 남감리교는 주로 한국의 중부와 서부 지방에서 선교하기로 결정하였다.
데이비스의 죽음 이후 두 번째로 1891년 10월 12일 부산항에 들어온 인물은 존 멕카이 목사를 비롯한 5명의 선교사였다. 이들 가운데 멕카이는 건강이 좋지 않아 한국을 떠났다가, 1892년에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멕카이는 초량 지역에 선교사의 주택을 구하여 부산 선교의 거점으로 삼았다. 후일 선교지 조정안에 의하여 초량 지역을 북장로교 선교부에 넘겨줌으로써 부산진 지역, 곧 동구 좌천동 686번지 일대는 호주 선교부의 거점이 되었고,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부산진의 좌천동 일대는 호주 선교부 관계 기관의 중심지가 되었다.
1894년에 앤드류 아담슨 목사가 선교사로 부임하였다. 아담슨은 1914년 한국에서 은퇴할 때까지 부산과 마산에서 활동하였다. 아담슨은 호주 선교부의 부산 정착을 위하여 전도, 교육, 자선 사업 부분에 힘을 썼다. 그래서 1895년(고종 32)에 설립한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는 호주 장로교 선교부의 첫 교육 기관이자 부산·경상남도 지방 최초의 근대 여성 교육 기관이었다. 해방 이전까지 경상남도 지방 최고 최대의 여학교였다. 호주 선교사들은 여성 교육뿐만 아니라 남자를 위한 교육도 시도하였다. 또 의료 사업으로 1910년에 부산나병원(釜山癩病院)을 설립하였다. 본래 이 병원은 어을빈[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의사가 수 명의 환자를 수용한 데서 비롯되었는데, 1911년 호주 선교자의 관리로 옮겨졌다. 또 이들 나환자의 미감염 아동들을 격리하기 위하여 1932년 범일동에 격리 고아원을 설치하였다.
2.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식민지 정책은 종교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일본 신교파의 부산 포교는 종교적 침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신교 교파 중에서 부산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일본 기독교파였다. 이 교파의 전도국 간사 귀산행차랑(貴山幸次郞)이 천진의 교회를 보정(保定)에 설립하면서 한국 전도를 준비하였다. 그 후 1904년(고종 41) 일본 기독교파가 추원무웅(秋元茂雄) 목사를 부산에 파견하였는데, 그때 세운 교회가 보수동에 있었던 부산일본기독교회[현 광복교회]이다. 당시의 신도나 포교 대상은 주로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 거류민이었다.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이 일본 기독교파는 본국 동경에서 연합기독회를 개최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 안의 요지 및 대만[당시의 식민지]에 전도사 겸 위문사를 파견하여 전쟁터에 나간 출정인 및 그 가족을 위로하기 위하여 포교에 노력하였다. 이것을 볼 때 일본이 근대화하면서 지니는 기본적 성격이 교회에도 그대로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일본의 기독교 계통에서 부산에 들어온 교파가 많았는데, 1906년 1월에 성공회, 1913년에 일본 Methodist[감리회] 교파, 1920년 7월에 구세군 등이다.
한편 일제는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군사적 침략 전쟁을 강화하고, 아울러 문화적인 동화 정책도 강화시켜 나갔다. 외래 종교인 기독교에 대한 박해도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하게 되는데, 그 근본적인 원인은 근대 일본 사회의 구조적인 특질 가운데서의 필연성에 기인한 것이다.
일본이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그 기준을 인간이나 인류 사회의 보편적인 발전에서 찾지 않고 자기 나라 중심으로 진행시켜 나갔다. 일본의 군부 관료가 천황제 기구로서 천황제 군대를 구축하여 파시즘화하려면 천황을 신으로, 그것도 살아 있는 현신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따라서 일본의 새 종교인 신도(神道)가 생겼다. 전 국민에게 신도를 밀어붙이려면 다른 종교를 허용할 수 없었다. 기독교 박해는 이러한 사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국권 강탈 이후 일본은 그 신도를 만세일계(萬世一係)의 식민지의 동화 종교로 삼고 보급시키기 위해 각처에 신사(神社)를 세웠다. 1930년대까지는 한국인에게 그리 심하게 강요하지 않았지만 1930년이 지나면서 학교마다 신사의 대신 격인 봉안전을 만들고 신책(神柵)이란 것을 집집마다 세우게 하여 유일신 하나님 이외의 신이 존재할 수 없는 기독교와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선교사나 교인까지 일본의 소위 현인신(現人神)의 조상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이란 신을 모신 신사를 참배하게 했다. 그뿐 아니라 현인신이 있다는 궁성을 향해 요배까지 강요하였다.
진주만 사건을 계기로 미일 전쟁이 일어나자 모든 외국인 선교사는 한국에서 추방을 당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심해지자 한국 교회에 대한 경찰의 압제는 날로 심해졌다. 200여 개의 교회를 폐쇄하고, 2천여 명의 목사·신자들을 투옥하였으며, 50여 명이 순교하였다.
이렇게 교회가 일제의 폭압을 받아 무너져 갈 때, 일본 기독교 계통은 대부분 신사 참배를 지지하였다. 이에 따라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일본 기독교단에 항쟁하는 교역자도 있었다. 주기철(朱基徹) 목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과정에서 옥사하였다.
광복 전 부산 교계는 한국 전체의 교계와 함께 위축되어 있었다. 부산[당시 부산부] 장로교에는 초량교회, 부산진교회, 영주동교회[현 제일영도교회], 항서교회, 구포교회, 동래읍교회 등 6개 교회가 속하였고, 그 교인 수는 1,000여 명 내외였다. 성결교회는 수정동과 온천동 두 군데였고, 구세군은 범일동에 교회가 있을 뿐이었다. 1931년에 교인 수[부산부]가 초량교회를 제외하고 992명인데, 1945년에 1,000여 명이라는 것에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3. 광복 이후
일제의 식민지를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면서 기독교에서 교회의 재건을 둘러싼 여러 가지 문제 중에 가장 중심적인 것은 신사 참배를 둘러싼 것이었다. 이것은 종교 신앙의 중심 문제인데, 광복 후 이 문제로 교회의 분열은 매우 심각했고, 또 교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 신사 참배 반대로 투옥되었다가 광복 후 출옥한 교역자를 중심으로 고신파(高神派)가 형성되어 부산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에 신사 참배 강요에 반대하다가 투옥당한 70여 명의 교역자 중 주기철 목사 이하 약 50여 명은 옥중에서 순사하고, 나머지 20여 명은 광복 후 출옥하였다. 이들은 출옥 후 평양에서 약 2개월간 체류하면서 교회 재건에 관한 여러 문제를 토의하고, 1945년 9월 그들은 한국 교회 재건의 기본 원칙을 발표하였다. 첫째, 신사 참배한 교역 지도자는 참회하고 정화한 이후에 교역에 나선다. 둘째, 목사는 최소한 2개월간 휴직하고 참회한다는 내용이다. 이 기본 원칙을 전국 각 노회(老會)에서 일제히 실행케 할 것을 통보하고, 그 외 신학교를 복구 재건하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리하여 가장 먼저 재건에 노력한 곳은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남도 장로교회였다. 1945년 9월 2일 부산시 교회 연합 예배 시에 최재화, 노진현, 심문태 등 20여 명의 교역자들은 신앙부흥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과거의 모든 죄과를 청산하고 정통 신앙에 입각하여 교회 재건에 매진할 것을 결의한 후 교회 재건과 노회 복구에 대한 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9월 18일 부산진교회에서 경상남도노회가 재건 조직되었고, 12월 3일에는 제47회 경상남도노회가 개최되어 회장에는 출옥한 주남선(朱南善) 목사를 추대하였다.
한편 보수 신앙의 회복과 함께 한국 교회를 재건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칠 학교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한상동(韓尙東)과 주남선 목사는 1946년 4월 서울에서 박윤선 목사를 만나 그의 협조로 5월 20일에 고려신학교 설립 기성회를 조직하였다. 고려신학교는 1946년 9월 20일 부산 금성중학교의 한 교실에서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또 교회 재건의 기본 원칙을 실시되지 않았던 현 교직자들의 자숙을 철저히 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일부의 교권주의자들은 자숙을 거부하고 여전히 교권 장악에 몰두하였다. 그러다가 1946년 12월 3일 진주 봉래동교회에서 열린 경상남도노회 제48회 정기 노회에서 일제 때 경상남도 교구장을 지내고 신사 참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김길창(金吉昌) 목사가 노회장으로 선출되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노회는 신사 참배는 더 이상 거론하지 못하도록 가결하였고, 더 나아가 앞서 설립된 고려신학교의 인정을 취소하고 신학생 추천도 취소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상동 목사는 경남노회를 탈퇴하였다. 이것은 교계에 큰 파문을 일으켜 진해 경화동교회를 시발로 초량교회, 문창교회, 부산진교회, 거창읍교회, 영도교회, 남해읍교회 등 6개 교회는 부패한 경남노회를 바로잡기 위하여 투쟁하기로 하고, 1947년 1월 3일자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 결과 김길창 목사 이하 전 임원은 사퇴하고, 결국 한국 교회의 영적 갱신 운동과 재건 운동은 갈등과 분리를 거듭한 결과 대한예수장로회와 정통 교단인 고려파 교단으로 분리하게 되었다.
6·25 전쟁은 민족적 시련이기도 하지만 한국 교회는 분열을 거듭하는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1950년대 중반기부터 싹이 트기 시작한 통일교[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나 박태선(朴泰善)의 전도관 및 수도원 입신 형태의 여러 신흥 종파들은 실로 기성 교회에 대한 일대 도전으로 등장하였다.
1960년대 한국 기독교에는 두 가지 기류가 흘렀다. 보수적 한국 기독교는 완전히 정교 분리 정책에 서서 탈정치화하고 기독교를 심령적 차원의 종교 영역으로 제한하며,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적 자유주의 이념을 무의식적으로 따르고 있었다. 한편 급진적 한국 기독교는 하나님 선교의 신학에 서서 기독교 정치·사회 사상 등과의 유기적 관계성을 터부시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1960년대 제3 공화국의 군사 정권에 대한 강한 저항을 보였고, 이는 군사 정권이 막을 내릴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부산의 기독교도 동참하고, 몸을 불리고 내적 결실을 다져 나갔다. 1970년대 이후에는 위에서 언급한 분파가 더욱 세분화되어 갔다. 이것은 부산의 기독교도 같은 추세였다.
[현황]
현재 우리나라의 개신교 인구는 전 인구의15% 정도로 간주되지만 부산에는 전국 평균 이하인 9~10% 정도로 추정된다. 개신교회는 교육, 의료 복지 등 부산 지역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2014년 현재 주요 종단은 고신 298, 구세군 9, 그리스도의 교회 5, 기감 59, 기성 74, 기장 16, 기침 102, 기하성 75, 나사렛 2, 대신 14, 루터 2, 백석 4, 복음교회 4, 브니엘 70, 성공회 7, 예성 4, 재건 19, 총공회 11, 통합 256, 합동 494, 합동개혁 15, 합동보수 4, 합신 34이다[가나다 순, 옆의 숫자는 소속 교회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