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8185
한자 國債報償運動
영어공식명칭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회운동

[정의]

1907년 1월 대구에서 발생하여 국내외로 확산되면서 다양한 계층이 참여한 경제 주권 운동.

[개설]

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廣文社) 내에 경상북도 각 군의 유지들로 구성되어 있던 문회(文會)는 특별회를 열고 대구광문사의 문회를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변경하였다. 이날 열린 특별회에서 광문사 부장 서상돈(徐相敦)이 국채 1300만 환을 갚아 일제로부터 국권을 보전하자고 제안하였고, 광문사 사장 김광제(金光濟)가 호응하면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었다.

[내용]

1907년 2월 21일 「국채일천삼백만환보상취지서」가 『대한매일신보』와 『대한자강회월보』에 소개되면서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으로 파급되었고, 국채보상운동을 담당할 조직으로 대구 금연상채회가 만들어졌다. 금연상채회 의장은 이현주(李玄澍), 부의장은 정재학(鄭在學), 총무는 정규옥(鄭圭鈺), 재무는 김병순(金炳淳)서상돈이 맡았으며, 평의원은 서병오(徐丙五)를 비롯한 21명이었다. 금연상채회는 민중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하여 대구민의소(大邱民議所)를 조직하고, 의연금을 담당할 기구로 서문 밖 수창사(壽昌社)에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를 설치하였다. 또한 북후정(北堠亭)에서 대구 군민대회를 개최하여 국채 보상을 위한 의연금 모금 활동을 벌였다. 2월 23일에는 대구 남일동에서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가 조직되어 은가락지와 은장도 등을 의연금으로 모금하였다. 대구민의소는 2월 24일 서문시장 장날을 기하여 북후정에서 다시 군민대회를 열었는데, 경찰이 출동하여 군민대회의 연사를 연행하고 대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에 대구의 4개 면민들은 서상하·도정호·이근영을 대표로 선정한 뒤 서울에 파송하여 각계의 참여와 지원을 요청하였다.

금연상채회와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가 경상북도 각 지역에 취지문을 돌리자 1907년 3월 13일 고령에서 고령군국채보상회가 조직된 것을 시작으로 성주·선산·김천·청도·상주·경산·예천·문경·현풍·용궁 등 경상북도 각지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위한 기구가 결성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1907년 7월 10일 경북국채보상총회가 결성되었다. 서울에서도 국채보상기성회와 국채보상중앙의무사가 조직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국채보상기성회·단연회·국채보상의성회·국채보상의무회·국채보상동맹·단연동맹회·국채보상혈맹회 등이 조직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3월 28일 대한매일신보사가 설치한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와 1907년 4월 황성신문사가 설치한 국채보상연합회의소가 설립되면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대구의 금연상채회는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와 국채보상연합회의소의 통합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이후 의연금 관리 문제와 일제의 탄압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침체되자 대구 금연상채회는 1909년 10월 15일 자 『황성신문』과 10월 19일 자 『대한매일신보』에 전국대표자회의를 소집하는 광고를 내는 등 의연금의 합리적 사용을 모색하였으나 침체 국면을 전환시킬 수는 없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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