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986
한자 鄭在學
영어공식명칭 Jung Jaehak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58년 6월연표보기 - 정재학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8년 - 정재학 대한협회 대구지회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13년 - 정재학 총독부로부터 대구은행 설립 인가
활동 시기/일시 1917년 - 정재학 대구 교풍회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정재학 자제단 발기인으로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정재학 대동무역주식회사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25년 - 정재학 중추원 참의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정재학 조선미곡주식회사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27년 12월 - 정재학 대구은행과 경남은행 합병 추진
몰년 시기/일시 1940년 4월 2일연표보기 - 정재학 사망
출생지 대구 - 대구광역시
거주|이주지 대구 - 대구광역시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경제인|친일파
성별 남성

[정의]

개항기 대구에서 활동한 경제인이자 일제강점기 친일 금융인.

[개설]

정재학(鄭在學)[1858~1940]은 1858년 6월 대구에서 태어났다. 개항기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고 민족자본 형성에 기여하였으나, 일제강점기 중추원 참의를 지내는 등의 친일 행보를 보였다.

[가계]

정재학의 본관은 영일(迎日)이며, 아버지는 정석은(鄭錫殷), 어머니는 손남산(孫南山)이다.

[활동 사항]

정재학은 1882년에 사헌부감찰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1897년 탁지부참서관, 1905년 순흥(順興)군수를 역임하였다. 1907년 대구지방위원이 되었고, 1908년에는 개령(開寧)군수에 임명되었다. 대구 금연상채회(禁烟償債會)의 부의장으로 활동하며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고, 1908년 대한협회 대구지회에 가입하였다. 8월에 대구농공은행과 진주농공은행이 합병되어 경상농공은행이 설립되자, 주주로 참여하고 감사역을 맡았다.

정재학은 1911년 경상북도 도참사를 지냈으며, 대구전기주식회사에 출자하였다. 1912년 7월 대구은행 설립계획서를 총독부에 제출하여 1913년 1월 설립인가를 받았다. 5월 제1회 주식 대금 12만 5000원의 불입을 완료하고 창립총회에서 은행장으로 선출되었다. 1918년 경상농공은행을 대신하는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이 설립되자 상담역이 되었고, 대구의 자본가들과 함께 조선물산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정재학은 1917년 조선총독부가 민풍을 개량한다는 명목 아래 교풍회(矯風會)를 조직할 때 대구 교풍회의 회원이 되었고, 1919년에는 3·1운동을 방해하기 위하여 결성된 자제단(自制團)의 발기인이 되었다.

정재학은 1919년 대동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1920년에도 동양기류주식회사와 서울 동대문에 연초회사인 동지상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대구은행·경일은행 등에 출자하여 금융자본가로 발돋움하였다. 1920년 후반 조선총독부가 금융제도연구회를 만들어 은행의 통폐합을 추진하자, 1927년 대구은행과 경남은행 간 합병 논의가 시작되어 12월에 대구은행정재학과 경남은행 전무 서상호가 합동 각서를 교환하고 조선총독부와 조선은행에 승인을 신청하였다. 두 은행의 합병은 경영권 때문에 지연되다가 당국의 중재를 통하여 성사되었고, 은행의 명칭은 경상합동은행으로 정하였다. 창립총회에서 은행장으로 정재학이 선출되었으나 총독부의 간섭으로 이병학이 은행장이 되고 정재학은 고문으로 선임되었다.

정재학은 1910년대와 1920년대 대구상업회의소의 대의원으로 활동하였고, 1922년 9월에 개장된 대구곡물시장에 깊이 관여하였다. 나아가 대구에 미곡거래소를 설립하기 위한 활동에 개입하고 이익단체인 대구미곡상조합[대구미우친목회]에도 가입하였다. 1927년에는 조선미곡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미곡 및 잡곡 무역에 직접 나서기도 하였다. 1925년부터 1927년까지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참의로 활동하였다. 정재학은 1940년 4월 2일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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