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4515
한자 天主敎
영어공식명칭 Catholic Church
이칭/별칭 가톨릭교회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병희

[정의]

대구광역시에서 활동하는 가톨릭교회.

[개설]

천주교는 가톨릭교회를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다. 가톨릭이란 보편적 교회라는 뜻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종교이다. 교황을 수장으로 두고 있으며 바티칸 교황청을 중심으로 나라별, 지역별로 교구라는 조직을 두고 있다. 중심인 바티칸 교황청이 로마교구여서 ‘로마가톨릭교회’라고도 부른다.

대구광역시의 천주교회는 한국교회 18개 대교구[1999년 기준] 중 하나인 천주교 대구교구이다. 천주교 대구교구는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 남부 지역을 관할하는 자치 교구이다.

[천주교의 전래와 역사]

예수 그리스도는 승천할 때 12제자들에게 교회를 세워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위로하고 명령하였는데, 그 최고 책임을 사도 베드로에게 위임하였다. 12제자들의 선교적 열정은 예루살렘을 벗어나 시리아, 그리스, 로마 등지로 신속하게 확장되었다. 천주교는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무신론자로 간주되어 로마제국 전역에서 250여 년 가혹한 박해를 받았지만, 순교자적인 신앙을 지켜 마침내 313년 신앙의 자유를 얻었고, 392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재위 시 마침내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천주교의 한국 전래는 일본에 진출하여 있던 예수회 소속 세스페데스(G. Cespedes) 신부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파견된 일본인 천주교 장병들의 신앙을 돌보기 위하여 내한함으로써 비롯되었다. 조선에서의 천주교 선교는 직접적으로 전개되지 못하였으나, 전쟁으로 인하여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한국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로 개종하였다.

한편, 중국에 진출한 예수회 선교사들도 북경에 내왕하는 조선 사신들을 통하여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갖고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그중에 리치(M. Ricci)와 샬(A. Schall) 선교사는 중국 황실과의 인연을 계기로 북경을 찾아 온 조선 사신들과 서양 문물을 매개로 학문과 종교에 관하여 필담을 나누게 되었다. 선교사와 사신들의 교류를 계기로 부경사(赴京使)를 통하여 비로소 서양 문물이 조선에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천주교의 조선 전도는 여러 경로를 통하여 시도되었으나 좀처럼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다만 중국의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저술한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만 조선에 도입되었다. 이렇게 도입된 한역서학서는 실학자들에게 읽히고, ‘서학’이란 새로운 학풍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서학은 학문적인 관심에서 연구되기 시작되었으나, 점차 학문적인 관심을 넘어 신앙으로 수용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1784년(정조 8)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 이벽(李蘗)·정약전(丁若銓) 등과 함께 신앙공동체를 구성함으로써 비로소 조선에 천주교회가 창설되었다. 1794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조선에 파견되어 선교활동을 전개하면서 천주교는 교세를 확장하였다. 그러나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辛酉迫害)는 조선 천주교회를 초토화하였다. 그럼에도 1837년에는 조선 교구는 독립 교구로서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대구광역시의 천주교 전래는 영남 지방에서 최초로 서학을 연구하여 신자가 된 홍유한(洪儒漢)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827년 정해박해(丁亥迫害) 때, 대구 경상감영의 감옥에 갇힌 홍유한의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보고 스스로 천주교에 입교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대구에 살던 서용서[김수환 추기경의 외할아버지]도 있었다. 이후 1830년에서 1835년 사이에 경상북도 달성군 하빈면 낙골에 살던 이재건과 이재건의 가족이 칠곡 신나무골 교우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대구 민묵골[전 애락원 부근]에 정착하여 신앙의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1885년 12월 프랑스 선교사인 로베르(A. P. Robert)[한국명 김보록(金保祿)]가 칠곡 신나무골에 대구본당을 설립하여 초대 주임 신부로 시무하였다. 1903년 11월 1일 계산성당이 축성되었으며, 1911년 4월 8일 대구대목구[준교구]로 설정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전시체제에 돌입하면서 선교사 철수를 명령하자 천주교 선교사들은 서울과 대구 교구를 한국인 성직자들에게 위임하고 조선을 떠나게 되었다. 그 후 대구교구는 한국인에 의한 자치 교구로 운영되면서 전도 활동을 전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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