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866
한자 李相薰
영어공식명칭 Lee Sanghu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4년연표보기 - 이상훈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0년 6월 - 이상훈 대구노동공제회 대구지회 참가
활동 시기/일시 1925년 10월 25일 - 이상훈 달성군청년연맹 집행위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4년 - 이상훈 조선건국동맹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45년 8월 16일 - 이상훈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46년 1월 - 이상훈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47년 3월 - 이상훈 남조선노동당 경북도위원회 위원장 역임
출생지 대구 - 대구광역시
거주|이주지 대구 - 대구광역시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독립운동가|사회주의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남조선노동당 경북도위원회 위원장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운동가.

[개설]

이상훈(李相薰)[1894~?]은 1884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 활동을 시작으로 정오회·대구노동공제회·조선노농총동맹·조선공산당·조선건국동맹 등에서 활동하였다. 광복 후에는 조선공산당 경북도위원회·대구공동위원회 등 좌익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이상훈은 1920년 6월 창립된 대구노동공제회 대구지회에 참가하였고, 교육부에 소속되어 노동야학 교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2년에는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 간사가 되었고, 1923년 대구노동공제회 대구지회가 대구노동공제회로 전환할 때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25년 2월 경상북도 예천에서 형평사원 피습 사건이 발생하자, 대구의 10개 단체가 연합하여 만든 대책협의회의 임시의장이 되었다. 조선노농총동맹이 지방 각 산하단체에 노동·농민을 별도로 하는 연맹 설립에 대한 의견을 수렴할 때 대구노동공제회의 간선위원으로 선정되었으며, 경북 지역의 화요회계가 발의한 경북청년연맹의 기성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어 10월 25일에 발의된 달성군청년연맹의 집행위원이 되었다.

이상훈은 대구에서 사상단체 정오회(正午會)를 대표하는 인물로 활동하며 1925년 일제가 「치안유지법」을 실시하려 하자 치안유지법대책위원회에 정오회 대표로 참여하였다. 이후 최원택(崔元澤)을 통하여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고,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았다.

이상훈은 1944년 조선건국동맹에 가입하여 정운해(鄭雲海)와 함께 경상북도 책임자로 활동하였으며,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16일 복양당 한의원에서 김관제(金觀濟) 등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를 결성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는 8월 22일 우익의 경북치안유지회와 통합하여 건국준비경북치안유지회가 되었다. 10월 18일 미군정이 건국준비경북치안유지회를 해산하자 이상훈경상북도인민위원회 결성에 참여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1946년 1월 좌익 계열의 통일전선 조직으로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 경북지부에 참여하였고,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경북 대표로 참가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6월에는 좌우익 정당이 참여한 대구공동위원회조선공산당 5인 대표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식량 문제 해결과 치안, 그리고 8·15 광복 행사 등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46년 9월 총파업이 발생하자, 이상훈은 9월 28일 미군정이 긴급하게 개최한 대구공동위원회조선공산당 대표위원으로 참가하여 파업의 주요 원인인 식량 문제의 해결 방안을 논의하였다. 이상훈10월항쟁 선동 용의자로 미군정 당국의 제5관구경찰청에 검거되어 장시간 갇혀 있다가 1947년 2월 무렵 석방되었다. 이상훈은 1947년 3월 좌익 정당의 연합체로 결성된 남조선노동당 경북도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었다. 이상훈한국전쟁 전후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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