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성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655
한자 彗星團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19년 4월 17일연표보기 - 혜성단 조직
해체 시기/일시 1919년 5월연표보기 - 혜성단 해체
성격 독립운동 단체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에서 계성학교 학생들이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

[개설]

혜성단(彗星團)김수길, 이종식 등이 대구 지역에서 결성한 독립운동단체이다. 대구 3·1운동의 지속과 확대를 위한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으며, 국외의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계를 모색하기도 하였다.

[역사적 배경]

대구 지역 3·1운동은 1919년 3월 8일부터 4월 28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특히, 계성학교 학생들은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 개신교 계열 인물 등과 함께 대구 3·8 서문시장 만세 시위, 3·10 대구 동문시장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계성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의 등교를 금지하여 대구 지역 3·1운동을 약화하고자 하였다. 한편, 대구 3·8 서문시장 만세 시위, 3·10 대구 동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으나 체포되지 않은 계성학교 학생들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고향에서 3·1운동을 일으켰다.

대구 3·1운동에 참여하고 혜성단을 조직하여 활동한 김수길 역시 김천에서 3·1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대구로 다시 돌아왔다. 김수길은 자신처럼 대구 3·1운동에 참여하였던 대구 계성학교 학생 이영식·허성도, 대구 거주 이종식 등과 함께 꺼져 가는 대구 지역 3·1운동을 확산시키고자 여러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조직]

혜성단에 참여한 인물은 김수길, 이종식, 이영옥, 이명건, 이영식, 허성도, 이기명, 이종헌, 최재화, 이수건, 이덕생 등이다. 혜성단은 주로 대구 계성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다. 김수길, 이영식, 이기명, 이덕생, 허성도, 이종헌 등이 계성학교 출신이다. 최재화는 야소교회 집사로 선산 출신이고, 이영옥이명건과 같이 칠곡 출신이고, 이종식은 대구 출신으로 곡물상이다.

혜성단은 5계 조직으로 구성되었다. 문서 제작 및 인쇄를 담당하는 인쇄계는 최재화·김수길, 문서 배포를 담당하는 배달계는 허성도·이덕생·이종식·이종헌·이기명, 경비 조달을 담당하는 출납계는 이수건, 만주출장계는 이영옥, 연락 업무를 담당하는 연락계는 이명건이 맡았다. 혜성단은 대구에 본부를 두고 서울·상주 등 전국 각지에 지부를 설치할 계획을 세웠다.

[설립 목적]

혜성단은 대구 3·1운동을 확대, 발전시키고, 나아가 해외 독립운동단체와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확대시키고자 설립되었다.

[변천]

혜성단은 1919년 4월 17일 조직되었다. 1919년 5월 14일 혜성단의 핵심 인물인 김수길대구경찰서에 체포되면서 해체되었다.

혜성단원은 1919년 7월 1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출판법」 위반,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협박, 사문서 위조 행사 등으로 김수길은 징역 2년 6월, 이종식은 징역 2년, 이영옥·이명건·이영식·허성도·이기명·이종헌·최재화·이수건·이덕생은 징역 1년 6월을 선고 받았다. 선고에 불복한 김수길·이종식·이영·이명건은 항소하였고, 1919년 10월 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이례적으로 1심보다 형량이 높아져 김수길은 4년, 이종식·이영옥·이명건은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다. 1919년 5월 14일 혜성단원이 체포되는 과정에서 방명원도 체포되었지만,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혜성단의 활동은 1919년 4월 17일 혜성단이 조직되기 전과 후로 나눠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1919년 3월 31일부터 4월 16일까지이다. 주로 격문을 발송하여 활동을 전개하였다. 철시 투쟁 독려, 대구 3.8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을 체포한 경무부장과 대구경찰서장에 대한 암살 경고, 조선 독립의 가능성 선전, 일본 상품 불매 및 일본인과 금전 거래 금지 독려, 자제단 결성과 3·1운동 확산을 방해한 중추의원 박중양과 명치2가 구장 백응훈에 대한 암살 경고 등의 활동을 펼쳤다. 주로 대구 3·1운동을 확산시키는 구체적인 방안을 선전하고 실천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 기간에는 아직 조직을 갖추지 않은 채 주로 대구 지역에 한정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김수길, 이영식, 허성도계성학교 학생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고 곡물상 이종식, 목사 최재화 등도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7일 혜성단이 설립되고, 조직이 갖춰지면서 활동 양상이 달라졌다. 우선, 민족 자산가에게 독립운동 자금 염출을 호소하고, 제1차 유림단 의거 관련 내용 소개를 통한 독립 가능성 선전, 철시 투쟁 독려, 일본 화폐 사용 금지 요청 등 독립운동을 펼쳐야 하는 당위성과 방법을 좀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제시하면서도, 독립 자금 확보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한, 기존과 달리 대구 시내에 한정되지 않고 경상북도 각지를 대상으로 운동을 확산하였다. 발송 대상도 조선인 상인에서 일제의 식민 통치기구에서 일하는 관료로 넓혔다. 특히, 조선인 관료나 상인을 협박하는 수준이 아니라 조선인 관료나 상인도 설득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거나 철시 투쟁 또는 일본 상품 불매로 연결하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혜성단원은 국외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를 위하여 만주출장계를 별도로 만들었다. 실제 혜성단원 가운데 이영식은 출옥 후에는 만주에 들어가 목사로 일하면서 최만혁 등에게 군자금을 지원하고 교민들의 독립사상과 민족의식을 높였다. 최재화도 1920년 상주에서 체포되었다가 대구로 이송되는 도중에 탈주하여 7월 일본을 거쳐 중국 베이징으로 탈출하였다. 중국 베이징 교민단 대표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최고정치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약 두 달에 걸쳐 일어난 대구 지역 3·1운동을 지속하고 확장하는 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단체가 바로 혜성단이다. 대구 지역 3·1운동을 주도한 계성학교 학생 출신 일부가 혜성단을 만들고 격문 발송과 철시 투쟁을 이어 나갔다. 대구 지역 3·1운동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격문 발송을 이용하였다. 격문 발송과 철시 투쟁을 통하여 ‘제1차 대구 지역 3·1운동’과 ‘제2차 대구 지역 3·1운동’ 이후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던 대구 지역의 만세 시위 운동을 지속시키고, 각종 독립운동 관련 문서를 인쇄, 배포하여 각계각층에 독립 의식을 고취하여 차후 대구 지역의 만세운동과 민족운동이 일어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경북 지역 3·1운동을 일으키고 확산하는 데 역할을 하였던 인물들도 일부 혜성단 출신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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