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0980
한자 歷史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정의]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대구광역시 역사.

[개설]

대구는 지형적으로 영남의 중심부이며, 지리적으로 경상도 상변에서 뻗쳐 나온 소백산맥에 연이어 팔공연령이 병립하고 남쪽에는 구조곡이 나란히 발달한 가운데 산들이 겹겹이 펼쳐지면서 낙동강 중류에 합류하는 금호강금호강 지류인 신천이 퍼져 흐르는 분지에 속한다. 대구시 가로의 주요부는 대구분지 중앙에 자리 잡은 신천의 범람원으로 형성되었다. 대구는 전형적인 대륙성기후가 나타나, 여름에는 동변 계절풍이 무거운 더위를 날라 오고, 겨울부터 봄철에는 추풍령의 매운 한기를 몰아쳐 대구인들의 경제·사회·정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18년 대구 지표 조사에서 대구의 가장 대표적 이미지가 ‘더위’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고대]

대구의 땅에 인간이 최초로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이다. 2006년에 월성동에서 구석기 유물과 유적이 확인되었다. 그 뒤 신석기시대를 거쳐 청동기시대에 사람의 흔적이 본격적으로 확인된다. 대봉동에서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간돌검·붉은간토기 등이 출토되었고, 민무늬토기와 홈자귀·반달돌칼 등의 유물이 침산(砧山)·연암산(燕巖山)의 구릉 지대에 흩어져 있다. 또 대봉동 일대에 대체로 남북 일렬로 배열된 고인돌이 확인된다.

대구는 달구벌(達句伐)로 불렸다. ‘벌’은 들판이나 평지 따위를 가리키는 말로, 국가형태로 발전한 지역을 일컬었다. 대구는 신라시대에 달구화(達句火) 또는 달불성으로 불렸다. 달구화(達句火)에서 화(火)는 성(城)을 가리키는 신라 말인 ‘불’ 또는 ‘벌’에 대하여 한자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다. 따라서 달성(達城)은 달구화(達句火)에서 구(句)를 빼고 화(火)를 성(城)으로 바꾼 것이다. 달구벌은 달구화의 또 다른 표현이다. 대구에 있었던 소국은 달구벌국이며, 자연 촌락과 읍락 그리고 국읍이 중층적 구조를 보였다. 달성, 즉 달성토성에 기원전후 읍락 국가에 해당하는 달구벌국이 성립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달성에 대한 문헌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 261년(첨해이사금 15)에 달벌성을 쌓고 나마(奈麻) 극종(克宗)을 성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에 따르면 3세기 중엽에 달구벌국이 신라에 복속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늦어도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 무렵까지는 신라에 완전히 복속되었다.

대구는 신라 군현제 아래 위화군(腹火郡)달구화현(達句火縣)으로 나뉘었다. 757년(경덕왕 16)에 위화군수창군(壽昌郡)으로, 달구화현대구현(大丘縣)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대구가 신라시대에 정치적 요지로 기능하였던 것은 신라 5악 가운데 부악(父嶽)[八公山]이 포함되어 있거나 689년(신문왕 9)에 달구벌로 도읍을 옮기려 하였던 것에서 알 수 있다.

[고려]

대구는 후삼국의 쟁패기에도 신라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요충지로 인식되어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었다. 반야월, 은적사, 안일사 등 관련된 유적지가 대구 곳곳에 퍼져 있다. 그러나 고려의 재통일 이후 정치의 중심이 개경으로 옮겨지면서 신라 때와는 달리 그 비중이 점차 낮아졌다.

고려 초기의 대구 지역은 수성군(壽城郡)·대구현·해안현(解顔縣)으로 나뉘어 있었다. 수성군대구현을 영속하고, 해안현은 장산군(獐山郡)의 영현으로 편제되었다. 1018년(현종 9)의 전국적인 군현 개편 과정에서 수성군해안현이 동경(東京)의 속군·속현이 되었고, 대구현은 경산부(京山府)의 14속현 가운데 하나로 편입되었다. 그 뒤 1143년(인종 21) 대구현이 현령관으로 승격되어 점차 그 지위를 다시 인정받게 되었다. 12세기에 무신의 난이 일어난 뒤 대구 부근의 청도·밀양·경주 등지에서 민란이 빈발하자, 대구는 민란을 진압하기 위한 군사 활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대구는 몽고 침입과 연관된 역사를 품고 있다. 팔공산 부인사(符仁寺)가 대장경판과 더불어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몽고의 제5차 침입 때는 대구 주민들이 공산성(公山城)에 들어가 끝까지 싸우는 대몽 항쟁을 전개하였다. 또 고려 말 왜구의 약탈이 자행되면서 낙동강·금호강으로 바다와 연결된 대구도 두세 차례 약탈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조선]

비옥한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대구는 조선 건국 후 농업의 중심지로서 가구수가 증가하고 점차 거읍(巨邑)으로 성장하였다. 1394년(태조 3) 대구현수성현해안현을 영속하였다, 대구는 1419년(세종 1)에 군으로 승격하였고, 1466년(세조 12)에 마침내 도호부가 설치되었다.

대구는 영남 내륙 교통의 요지였으며, 진관체제(鎭管體制) 아래 용양위(龍蚊衛)의 중부가 설치된 군사적 중심지였다. 대구는 서거정(徐居正)과 같은 문장가와 정치가를 배출하였다. 대구는 많은 학자와 문인이 나와 영남학파의 일원으로서 경상도 사림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대구와 달성의 유교 문화는 과거시험과 같은 관리 등과를 위한 수업보다는 지역에서 도학(道學)을 실천하고 윤리를 보급하는 것을 중시하여 선비정신을 발양한 특징을 가졌다.

임진왜란 때는 대구 출신의 사림이 주축이 되어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두사충김충선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601년(선조 34)에 경상도 감영이 설치되면서 대구는 명실상부한 영남 지방의 중심지가 되었다, 대구부해안현·하양현(河陽縣)·경산현(慶山縣)·수성현·화원현(花園縣)·하빈현(河濱縣)을 포괄하는 거읍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대구의 물산과 경제는 17세기 이후 수공업이 발달하고, 낙동강을 낀 상업이 활성화되었다. 경상감영 외공장, 갑옷쟁이, 대장장이, 화살쟁이, 활쟁이, 나무쟁이, 가죽쟁이, 유기쟁이, 칠쟁이, 종이쟁이, 돗자리쟁이, 먹쟁이, 유구쟁이 등이 풀려나 사장 수공업으로 전환하였다. 여기에 한지, 사기그릇, 놋그릇, 가죽, 죽, 왕골 등이 시장 상품으로 생산되고 거래되었다. 순포령이 폐지되어 무명, 삼베, 명주 등의 시장 유통이 가능하게 되었다.

[근대]

대구는 1895년 갑오개혁 때 지방 관제의 개혁에 따라 변화를 맞게 되었다. 1896년 6월 25일 개혁에서 대구는 경상북도에 속하고, 대구군으로 편성되었다. 1896년 7월에 민중을 계몽하고 사회를 근대화하려는 독립협회가 창립되자 대구에서도 독립협회 대구지회가 설립되어 근대 개혁이 추진되었다.

개항 이후 대구에 천주교와 개신교가 들어와 선교 활동을 하면서 근대 서구 문명이 전파되었다. 그리고 1893년 9월 무렵 대구에 히자쓰키[膝付]와 무로[室] 등 일본인이 들어온 이래 1894년 8월 청일전쟁 때 대구에 남부병참선이 설치되었다. 그 뒤 러일전쟁과 경부선 철도 부설 공사를 계기로 개항장 부산에서 대구로 이주하는 일본인이 늘어나면서 일본의 대구 침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러일전쟁 이후 대구는 계몽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고,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일으켜 전국적 운동으로 확대하였다. 1905년 1월 대구역의 영업을 시작하고, 1906년 이사청이 개청되면서 일본인의 대구 이주는 급격히 늘어났다. 이어 대구읍성이 훼철되고, 그 자리에 도로가 생기면서 대구의 풍광은 급변하여 점차 식민도시의 모습을 갖추었다.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으로 식민지가 된 이래 대구는 일제의 내륙 거점 역할을 하면서 식민지 민족운동의 주요 기지로 작용하였다. 또 대구에 식민지 자본주의가 이식되면서 능금[사과], 제사 섬유, 서문시장, 교육도시 등 대구만의 특성화가 갖추어졌다

[현대]

광복으로 ‘세계 제일의 기쁨’을 느낀 대구는 이제 자주적 근대 국민국가의 수립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실현하여 나갔다. 그 과정에서 좌우 연합의 특징을 갖추면서도 10월항쟁, 대구6연대사건과 같은 역사의 상흔을 남겼고, 종국적으로는 남북 분단의 역사를 경험하였다. 6·25전쟁에서 대구는 민간인 학살, 피난 도시, 임시 수도, 낙동강 방어선, 대구 방어선, 국민방위군사건, 학도의용대, 대구 소개령, 양키시장 등과 같은 표제어를 남겼다. 1960년대, 1970년대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면서 대구는 직할시를 거쳐 광역시로 확대되었다. 능금[사과], 섬유에서 벗어나 의료, 광학, 자동차 등 새로운 산업들이 점차 부상하였다. 대구와 경북이 협력을 통한 상생 노력을 모색하고 있다. 그 가운데 대구는 대구의 정체성과 도시브랜드 제고 방안으로 ‘컬러풀 대구’와 ‘핫플 대구’를 전망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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