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7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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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定昌 |
영어음역 | Mun Jeongchang |
이칭/별칭 | 백당(柏堂),후미야마 사다마사[文山定昌]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백승충 |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관료이자 재야 역사가.
본관은 남평(南平). 호는 백당(柏堂). 일본식 이름은 후미야마 사다마사[文山定昌]이다. 부인은 박덕순이고, 자녀는 3남 1녀를 두었다.
문정창(文定昌)[1899~1980]은 1899년 경상남도 동래군[현 부산광역시 동래구]에서 태어나 동래의 동명중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23년 동래군 서기를 거쳐 경상남도청, 조선총독부 등에서 근무하였다. 1943년 황해도 은율 군수, 1945년 황해도 사회과장 등을 역임하면서 일제 말기까지 30여 년 동안 조선총독부 관료로 부역하였다. 이때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조선 조사 자료 총서의 일환으로 몇 권의 저서를 내기도 했는데, 이 책들은 후에 문정창이 한국사를 연구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광복 후 월남하여 미군정 하에서 잠시 조선농회(朝鮮農會) 총무부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1947년 공직에서 은퇴하고 개인 사업을 하면서 재야 역사가로 활동, 여러 권의 책을 냈다. 1976년에는 이유립(李裕岦), 안호상(安浩相), 유봉영(劉鳳榮), 임승국(林承國), 박창암(朴蒼岩), 박시인(朴時仁) 등과 ‘국사찾기협의회’를 결성하여 ‘국사 바로잡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1980년 2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광복 후 문정창의 한국사 연구는 일제 침략사와 한국 고대사 연구에 치우쳐 있었다. 이는 일제 식민사학에 대한 기성 사학계의 도전이 불충분하다는 비판의 차원에서 시도된 것이다. 예를 들어 일제가 날조한 ‘반도 사관’을 극복하기 위해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없었다거나, 백제의 활동 무대가 중국 대륙이었다고 주장하였고, 심지어 가야와 수메르 문명의 유사성을 내세우는 등 한국사의 외연 확대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침략상에 침묵하는 사학계의 풍토를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이를 소상히 밝힌 자신의 저서가 ‘일본인으로부터 받은 피해 계산서’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문정창의 한국사 연구의 뿌리는 일제 관료 시절 수집한 자료에 바탕을 두고 있는 만큼 이런 비판은 극히 모순적인 것이라 하겠다.
문정창이 쓴 주요 저서는 『산업 조합 설립까지(産業組合設立まで)』[1932], 『조선의 시장(朝鮮の市場)』[인간사, 1941], 『조선 농촌 단체사(朝鮮農村團體史)』[일본평론사, 1942], 『근세 일본의 조선 침탈사』[1964], 『군국 일본 조선 강점 삼십육년사』상·중·하[백문당, 1965~1967], 『단군 조선 사기 연구』[한뿌리, 1968], 『고조선사 연구』[백문당, 1969], 『일본 상고사』[백문당, 1970], 『한국 고대사』상·하[백문당, 1971], 『한국사의 연장-고대 일본사』[백문당, 1973], 『백제사』[인간사, 1976], 『이병도 저 한국 고대사 연구평』[백문당, 1976], 『광개토 대왕 훈적 비문론』[백문당, 1977], 『가야사』[백문당, 1978], 『한국-슈메르 이스라엘의 역사』[백문당, 1979] 등이다.
1932년 10월 국세 조사 기념장을 수상하였다. 일제 강점기 때 이사관, 군수 등을 지낸 이력 때문에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 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