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3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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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寧金氏 |
영어의미역 | Gimnyeong Ginsi|Cimnyeong Gim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부산광역시 |
집필자 | 주영택 |
[정의]
김시흥을 시조로 하고, 김원실·김의련·김영필·김복 등을 입향조로 하는 부산 지역의 세거 성씨.
[연원]
김녕 김씨 시조 김시흥(金時興)은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9세손으로 경상북도 의성에서 출생하였다. 고려 인종 때 문과에 합격하여 묘청의 난을 평정하여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졌으며, 명종 때 조위총의 난을 토벌하여 공을 세워 식읍을 하사받고 금주군(金州君)에 봉해졌다. 이후 후손들이 김시흥을 시조로 삼고 김녕을 본관으로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고려 말기에 김해로 개칭되자 본관을 김해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로왕 계통의 김해 김씨와 혼돈되어 김해 김씨를 선김(先金)으로, 김녕 김씨를 후김(後金)으로 칭하였다. 그러나 사육신 충의공 김문기(金文起)[1399~1456]의 명성이 크게 알려진 뒤 김문기의 후손임을 자칭하고 나서는 등 종통을 어지럽히는 일이 많아 1849년(헌종 15) 경상도 유생 김주성, 김근학, 김성현, 김치수, 김홍환 등이 선조의 사실 목록에 진정서를 첨부하여 예조에 상소하여 본관을 김녕으로 확정지었다.
김녕 김씨의 파명을 살펴보면, 영돈령공준파, 긴주목사공형파, 충정공준영파, 충경공경세파, 송암공질파, 만은공길상파, 충의공문기파, 대사성공지파, 도순찰사공문제파, 상서공문희파, 대산헌공파, 매계공파 등으로 대별된다.
[입향 경위]
김녕 김씨는 여러 파가 부산에 입향하였다. 그 시기도 임진왜란 전이다. 먼저 용호동의 봉사공파(奉事公派) 김원실(金元實), 모라동의 익하공파 김의련(金儀連), 삼락동의 충의공파 김영필(金永弼), 좌동 김복(金福) 등이다.
[현황]
1934년 조선 총독부에서 발행된 『朝鮮の姓』의 동래군조에는 김녕 김씨가 사상면 모라리에 22호, 유두리에 21호가 거주한다고 했으며, 1937년 문기주(文錡周)가 편찬한 『동래군지』의 성씨조에는 김녕 김씨가 세거(世居) 성씨로 기록되어 있다. 2000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김녕 김씨는 2만 591가구에 6만 7032명[남 3만 4651명, 여 3만 2381명]이 부산 지역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3년 현재 김녕 김씨는 남구 용호동, 사상구 모라동·삼락동, 해운대구 좌동 등지에서 세거하고 있다.
[관련 유적]
용호동 문중은 사정재(射亭齋)와 그 옆에 입향조의 묘소를 이장하여 매년 제향을 지내고 있다. 삼락동 문중은 유헌재(柳軒齋)에 입향조 이하 7대 16위 위패를 모시고 매년 음력 10월에 택일하여 시제를 올리고 있다. 좌동 문중은 금복 빌딩 7층에 위패 50위를 모시고 음력 7월 첫째 일요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