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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348
한자 儒敎
영어의미역 Confucianism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집필자 김강식

[정의]

부산 지역에서 행해지는 공자의 사상과 관련된 학문과 의례 및 활동 일반.

[개설]

유교는 공자(孔子), 맹자(孟子) 등 유가(儒家)의 정치사상과 학문 수양, 생활 의례 등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현세적 사상이자 일종의 종교이다. 우리나라에 유교가 전래된 것은 한자(漢字)의 도입 시기와 일치한다. 유교는 삼국 시대 이후 정치사상과 이념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에 성리학이 도입되면서 개인 수양과 생활 의례가 중시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이 국가 통치 이념이 되어 사회생활의 모든 면을 규정하는 틀로서 작용하였다. 부산 지역에는 조선 시대에 향교의 설립, 석전제(釋奠祭) 양로례(養老禮) 향음주례(鄕飮酒禮) 향사례(鄕射禮)의 시행, 서원의 건립, 제단과 사묘(祠廟)의 건립, 정려(旌閭)의 보급, 사례(四禮)의 시행을 통해서 유교가 본격적으로 보급되어 나갔다.

[통일 신라~고려 시대]

유교는 고대 국가의 성립과 함께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신라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태종대를 순수(巡狩)[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니던 일]하여 당시 부산이 중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757년(경덕왕 16)에는 거칠산군이 동래군(東萊郡)으로 한자식으로 표기되었다. 통일 신라 하대에는 당나라에 유학하여 유학을 배우고 귀국하여 사회 개혁을 주장했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이 해운대를 다녀갔다. 또 동래에는 온천이 있어 왕과 명사(名士)들이 왕래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부산에도 유교 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 시기에 정치 이념과 사회 윤리는 유교적 충효 정신이 강조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17대 인종(仁宗)과 동서 사이인 정서(鄭叙)가 고향인 동래에 유배되어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지었다. 동래 정씨정목(鄭穆)[1040~1105]이 1072년(문종 26) 과거에 급제하여 고위 관직에 오른 뒤 그 후손들이 연이어 벼슬해 고려의 대표적 귀족 가문이 되었다. 당시 과거의 시험 과목은 유교의 경전이었으며, 한편 지역의 교화와 인재 양성을 위해 향교가 지방에 건립되었다. 987년(성종 6)에 내린 교서(敎書)를 보면, 경전과 의서에 통달한 자들을 선발하여 진주목을 비롯한 12목에 경학박사(經學博士) 및 의학박사(醫學博士) 각 1인을 파견한다고 하였다. 고려에서는 향학의 형태로 유교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부산 지역도 서서히 인근 고을의 유교 영향을 받기 시작했을 것이다.

[조선 시대]

조선 시대에 들어와 유교는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다. 유교 문화 정책에 따라 관혼상제(冠婚喪祭) 등 유교 의례가 전반적으로 시행되었다. 또한 경서(經書)를 대량으로 간행하여 보급하고, 한글을 창제하여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등을 배포하여 대중의 교화에 힘썼다. 조선 중기에는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 등 뛰어난 성리학자들이 배출되어 한국 유학의 사상적 절정기에 달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 부산 지역에도 성리학의 보급과 정착이 시작되었다. 조선 초기에 학문 기관으로 향교와 문묘(文廟)가 세워졌다. 한편으로 부산 지역에는 음사(淫祀)를 대신하여 동래현사직동에 사직단(社稷壇)이 설치되고, 현의 동쪽 2리에 성황사, 현의 북쪽에 여단(廬壇), 절영도 신사(絶影島神祠) 등 세 곳에 산천단이 설치되었다. 이를 통하여 성리학에 입각한 제례가 확립되어 나갔다. 국가에서 성리학을 향촌 사회에까지 보급하자, 일반인들에게도 충효의 이념이 정착되었다. 성종대에 김득인(金得仁)은 부모가 돌아가신 후 여묘(廬墓)[부모가 죽었을 때 자식이 무덤 근처에 초막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키는 일] 3년을 하여 정문(旌門)을 세우고 관직을 제수 받았다.

왜란과 호란이 일어나자 유교의 영향은 충신과 열사의 의거로 나타났다. 부산 지역에서는 충의 정신에 따라 의병이 일어나고, 반송 삼절사의 양씨 3형제,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1551~1592], 정발(鄭撥)[1553~1592] 등이 전쟁에서 활약하였다. 임진왜란 후 열사들을 추모하는 충렬사와 이들의 뜻을 배우고 실천하려는 안락 서원이 건립되었으며, 송공단, 정공단 등 숱한 사묘와 제단이 만들어졌다. 조선 후기에는 동래 부사와 기장 현감으로 부임한 지방관들이 유교적 교화에 힘썼으며, 향촌 사회의 교화를 위한 향 등이 관 주도로 실시되었다. 이에 부산에는 유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인륜의 덕목인 충·효·의리 등을 다한 인물들을 기리는 정려와 효열비가 많이 세워졌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중시하는 유학의 새로운 사조인 실학(實學)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개항 이후]

개항 이후 신식 교육이 밀려오자, 동래 향교의 유림들은 1907년 동래 향교 안에 명륜 학교를 세워 유교적 가치관을 지키려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의 강압으로 향교가 지방관의 통제를 받으면서 교육적인 기능을 상실하고, 문묘 종사(文廟從祀)를 겨우 이어 나갔다. 그러나 부산 지역에서도 생활 속에서 행해지던 제례와 의례는 유교식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 1946년 성균관과 유도회(儒道會)가 창립되었다. 이때 유림 조직은 성균관, 유도회, 재단 법인 성균관으로 삼원화되었다. 재단 법인 성균관 아래에 각 시도별로 향교 재단이 있고, 그 아래에 전국 235개의 지방 향교가 있었다. 이때 부산에서도 성균관장의 임명을 받는 동래와 기장 향교의 전교(典校)와 장의(葬儀)가 임명되어 석전대제(釋奠大祭)와 삭망 분향례(朔望焚香禮) 등을 시행하게 되었다. 향교 안에는 의전, 교화, 총무, 조직, 재정, 선전 등의 부서를 두어 활동하고 있다. 현재도 동래 향교기장 향교는 부산향교유도회, 여성유도회 등 단체를 통해 현대에 맞는 한자 교육, 예절 교육 등의 유교 교육을 다양하게 시도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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