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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의 유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094
한자 開港期-儒敎
영어의미역 The Confucianism of the Busan in the Age of Civilization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영나

[정의]

조선 시대의 국가 이념이자 사회 이념으로 한말 부산 지역 사람들의 의식과 다양한 문화 형식 속에 광범위하게 남아 있는 유교적 가치.

[개설]

한말에는 정치적으로 외세에 의한 국권 상실의 위기가 있었고, 문화적으로는 서구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고 있었다. 이 때 유교 문화의 장래를 위해 여러 가지 타개책을 모색하였는데, 영남 유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정치에 참여하지 못했던 남인들이 정치적 소외에서 벗어나 부분적인 참여가 이루어졌다. 영남 유림들은 위정척사론을 주장하였는데, 외세에 대한 유학계의 대응이라는 점에서 기호(畿湖) 혹은 호남 지역의 위정척사론과 같이 하여 논리에서는 보편적이었지만 남인으로서의 정치적 한계도 내포하고 있었다. 또한 의병 항쟁에 선봉적인 역할을 하였다.

[영남 남부 지역의 학파]

영남 남부 지역의 대표적인 학파는 성재학파(省齋學派)이다. 이 학파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에게 연원을 두면서도 근기 지역에서 실학을 일으켰던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학맥이 성재(性齋) 허전(許傳)에 의해 다시 영남에서 계승되어 학파를 이루었다는 특징이 있다. 허전은 본래 경기도 포천 출신인데 1864년(고종 1) 68세 때 김해 부사로 부임하면서 영남에 성호학을 전하였고, 이로 인해 성재학파가 형성되었다.

성재학파는 성호 이익의 실학적 맥락을 같이 하면서 형식적인 예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기호학파이면서 남인으로서 영남의 퇴계 학통을 계승하였다. 또한 실용적인 개혁론을 주장하였지만 서양 문물과 함께 서학이 유입되고 있는 현실을 유학의 위기로 간주하였고, 끝까지 척사적 벽이단론(闢異端論)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서양 문화 전반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었고, 실용적인 면에서는 인정하였다.

[성재학파의 활동]

허훈(許薰)은 선산 출신으로, 29세 때 허전의 문하에 나아갔다. 허훈은 다른 성재 문인들과 달리 남명학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1895년 60세 때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청송에서 창의하여 의병장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의병 운동은 허훈의 아우 허로(許魯)와 허위(許蔿)가 적극적으로 이어 갔으며, 자신은 동생들의 의병 운동을 뒤에서 도왔다.

허훈의 아우 허위는 1896년 선산에서 창의하여 김산·상주·선산·성주·개령 등지의 연합 의진인 김산 의진에 참가하였고, 대구로 진격하던 중 관군에 패퇴한 뒤 다시 창의하였다. 1899년에는 조정의 여러 벼슬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07년에는 을사조약에 반대하며 경기도 연천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마침내 일본 헌병대를 습격하다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하였다. 허로 역시 의병 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제 강점기가 되자 허위의 자식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을 하였다.

장지연(張志淵)은 실학을 적극적으로 계승하여 애국 계몽 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1900년 37세 때 광문사(廣文社)의 편집 위원에 임명되자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와 『흠흠신서(欽欽新書)』를 먼저 간행하고, 정약용의 저작들을 연구하여 『증보대한강역고(增補大韓疆域考)』를 편찬하였으며 『성호 문집(星湖文集)』의 출판도 계획하였다. 그 뒤 시사총보사(時事總報社)와 황성신문사(皇城新聞社) 등의 주필을 거쳐 사장이 되었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실었다가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사장에서 물러난 뒤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대동학회(大同學會)를 조직하여 애국 계몽 운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그 후 진주의 『경남 일보(慶南日報)』 주필을 맡게 되었는데, 황현(黃玹)의 절명시(絶命詩)를 실었다가 『경남 일보』가 폐간되었다. 1913년에는 다카하시 도루와 신문에서 ‘공자교와 유학’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 1917년에는 『매일 신보(每日新報)』에 최초의 한국 유교 통사라 할 수 있는 『조선 유교 연원(朝鮮儒敎淵源)』을 총 125회 걸쳐 실었다.

노응규(盧應奎)는 1896년 2월 19일에 의병을 일으켰다. 1895년 을미사변, 단발령 등의 사건을 계기로 안의(安義) 장수사(長水寺)의 승려 서재기(徐再起)를 비롯해 정도현(鄭道玄)·박준필(朴準弼)·최두원(崔斗元)·최두연(崔斗淵) 등과 함께 창의 후 진주 향교로 들어가 관찰부를 습격·점령하였다. 이에 진주에서도 정한용(鄭漢鎔)·오종근(吳鐘根)이 의병을 이끌고 합세하였다. 그 뒤 진주를 거점으로 경상남도 남서 지역을 장악하였다. 노응규는 김해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개항장 부산 침공을 시도할 만큼 경상남도 전역에서 그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정한용의 배반으로 진주성을 관군에게 빼앗기고, 진주성 전투에서 서재기 등 여러 의병장이 전사함으로써 노응규의 진주의병진은 해산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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