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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의 유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414
한자 日帝强占期-儒敎
영어의미역 Confucianism in Busa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강식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 나타난 유교의 변화상.

[개설]

개항기에 유교는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장했다. 이후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유림(儒林)이 유교 개혁 운동을 했다. 그러나 과거제가 폐지되고 신식 교육이 들어오면서 향교가 교육 기능을 상실했다. 일제의 식민 통치가 시작되면서 유림의 독립과 의리 정신이 억압되었으며, 유림을 회유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전시 동원 체제가 되자 황도유교설(皇道儒敎說)[일본 천왕을 믿는 것을 유교와 일치시키는 것] 같은 친일적인 학설만 남게 되었다. 이에 유교는 국가 이념이나 국학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하나의 종교 단체로서의 위상만 갖게 되었다. 그러나 유교의 제례와 의례의 형식적인 부분은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 존속되었다. 한편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여전히 민족과 주체성의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유교가 저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일제는 유교의 비중을 실감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부산 유교계의 변화상은 향교의 변화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일제의 강압 속에서 공립보통학교가 증설되면서 향교 건물이 교사로 이용되었으며, 향교를 지방관에 복속시켜 향교의 자치권을 없애자 동래 향교기장 향교의 기능과 운영이 위축되었다. 그러나 민간에서 행하던 유교식 제례와 의례는 나름대로 부산 지역에서도 명맥을 유지하면서 유교풍을 지켜 나갔다.

[전개 양상]

개항 이후 일본의 영향을 빨리 받은 부산에서는 신식 학교가 여러 곳에 건립되었다. 이에 동래 향교에서는 1907년 동래 부윤(府尹)의 찬조금과 지역 유지의 의연금으로 사립명륜학교(明倫學校)를 세웠다. 동래 향교기장 향교는 1894년(고종 31)에 과거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교화 사업과 문묘(文廟)를 수호할 뿐이었다. 일제 강점 후 총독부령(總督府令)에 의하여 문묘 직원을 명예직으로 군수의 감독 하에 두어 문묘를 지키게 하자, 향교는 독자성이 사라졌다.

일제는 조선 침략 과정에서 유교가 한국 사회의 정치, 사회, 문화, 이데올로기를 지배하고 있으며, 윤리 도덕의 기초가 되고 있음을 알았다. 또한 유림은 향촌 사회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중앙의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으며, 향촌 사회의 자치와 풍습, 그리고 산업 분야의 중심 세력으로서 한국 사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세력임을 알았다. 따라서 일제의 유림 친일화는 정치적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관료 선발에 개입하여 유생 관료의 친일화를 유도하였으며, 일본식 유교를 이식하기 위한 사전 전략으로 친일 단체를 결성·후원하였다. 그리고 회유 정책과 함께 유학 교육에 대한 통제 정책을 실시하였다.

일제 강점기 일제의 정책은 부산 지역에서 시행되었다. 일제는 한국의 교육을 통제하고 유학의 말단 교육 기관인 서당(書堂)을 통제면서 유림계의 친일화 교육을 실시하였다. 1918년 2월 조선총독부령으로 「서당 규칙」을 반포하여 국어와 국사 교육을 금지하는 대신 일본어 교육을 강화하고, 항일 의식을 전수하는 서당 교사를 감시·회유하였다. 1910년 4월에는 「향교 재산 관리 규정」을 발표하여 대한제국 관찰사의 감독을 받아 부윤과 군수가 향교 재산을 관리하도록 했고, 이로부터 생기는 수입은 향교 소재 군내의 공립 학교나 관찰사가 지정한 학교의 경비로 사용한다고 규정하였다. 이 조치로 지방 유생의 중심 거점이었던 수많은 향교가 폐쇄되어 식민 행정 기관으로 귀속되었다. 즉 유림계의 공유 재산인 향교 재산을 독점함으로써 향촌 사회를 교화·교육의 장으로 변모시켰다.

또한 유생층을 회유하여 통치에 필요한 교화와 선전 도구로 삼기 위해 1911년 6월 경학원(經學院)을 설치하였다. 일왕(日王)의 보조금과 성균관(成均館) 재산 등으로 설립된 경학원은 유교를 숭상하고 폐풍(弊風)을 교정하고 미풍을 장려하며 교화를 비보한다는 목적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것은 유교의 인의충효(仁義忠孝) 사상을 강조하여 일왕에 순응하는 신민(臣民)을 만들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1915년 조선총독부는 향교 재산을 처리하기 위한 훈령을 내렸는데, 「동래 향교 재산 예규」에 나타나 있다. 1920년 향교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를 규정한 「향교 재산 관리 규칙」을 제정하고 막대한 향교 운영 자금을 장악하여 식민지 주민의 동화 정책에 사용하였다. 그러자 지역의 유림들은 유계회(儒契會)를 조직하고 향교의 운영 비용을 조달하여 일제에 맞서기도 하였다.

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점은 유림계에 큰 타격을 주었다. 유교 국가인 대한제국의 멸망은 유림들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기반을 붕괴시켰다. 특히 일제가 3·1 운동 이후 친일 유림 단체를 결성하도록 유도하여 1920년대에 유교 유사 단체가 많이 결성되었다. 또 망국의 책임을 유교와 결부시킨 일제 친일 사가들의 식민 사관은 일반인들의 유교에 대한 혐오감을 부추겼다. 이로 인해 유교는 대중적 지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특히 1937년에 결성된 조선유림연합회는 지방의 군 단위까지 조직을 갖추었다. 이 단체의 결성의 취지는 황도 정신에 입각하여 유도의 진흥을 도모하는 데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대동아 전쟁을 합리화하려는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 전 기간을 통하여 유교는 천도교, 기독교, 신종교 등 다른 종교에 비해 사회적 영향력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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