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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010
한자 1987年勞動者大鬪爭
영어의미역 Labor strife in 1987
이칭/별칭 7, 8, 9월 노동자 대투쟁
분야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노재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노동 운동
관련인물/단체 부산 지역 공업 노동자
발생|시작 시기/일시 1987년 7월 23일연표보기 - 태광산업 파업 농성
종결 시기/일시 1987년 9월 20일연표보기 - 가톨릭센터 농성 해산
발단 시기/일시 1987년 7월 25일 - 대한조선공사 파업 농성
전개 시기/일시 1987년 7월 27일 - 세신정밀 파업 농성
전개 시기/일시 1987년 7월 28일 - 국제상사 파업 농성
전개 시기/일시 1987년 8월 10일 - 대형선망 노동자 가두시위
전개 시기/일시 1987년 8월 11일 - 삼양식품, 태양사 등 파업 투쟁
전개 시기/일시 1987년 8월 18일 - 택시 기사 가두시위 투쟁
전개 시기/일시 1987년 8월 19일 - 동양고무 파업 농성
전개 시기/일시 1987년 8월 25~27일 - 만호제강 노동자 가두 투쟁
전개 시기/일시 1987년 8월 27일 - 대우자동차, 연합철강 등 12개사 노동자 농성 투쟁
전개 시기/일시 1987년 8월 28일 - 109개 회사 8,120대의 택시 9일간 총파업에 돌입
전개 시기/일시 1987년 9월 14일 - 6개 고무회사 노동자 가톨릭센터 농성
전개 시기/일시 1987년 9월 18~20일 - 민주 단체 대표의 농성 지지 단식 투쟁
발생|시작 장소 태광산업 - 부산광역시 동래구 구서동
종결 장소 부산 가톨릭 센터 -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 4가 81-1지도보기

[정의]

1987년 부산 지역에서 일어난 노동자들의 대중 투쟁.

[역사적 배경]

1970년대의 중화학 공업 전개와 1980년대 초의 3저 호황에 힘입어 1985~1986년에는 경제 호황이 전개되었다. 이에 생산량은 엄청나게 늘어났고 성과 분배에 대한 노동자의 요구와 기대는 높아졌다. 하지만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의한 초과 착취를 이윤의 원천으로 삼는 기업주의 태도는 여전하였다. 따라서 경제 호황에도 불구하고 취업률의 증가는 미미했는데, 이는 생산량의 증가가 실업자를 포섭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시간을 늘리고 노동 강도를 높이는 형태로 작용했음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노동자의 상태를 더욱 열악하게 만들었고, 1987년 7월·8월·9월에 전국의 사업장에서 노동자의 생존권 투쟁이 격렬하게 분출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즉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근본 원인은 그간 기업가들이 지녀온 전근대적인 노사관과 기업주 위주의 일방적인 노동 행정에 있었다. 그럼에도 정부는 노동자의 생존권 요구를 외부 세력의 선동이나 노동자의 과격성과 폭력성으로 치부하고, 경찰력을 동원한 물리적 탄압을 고수함으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부산 지역의 노동자 투쟁은 1986년부터 부분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여 1987년 상반기에 대양고무, 대한조선공사 투쟁으로 시작되었다. 대양고무 노동자의 근로 조건 개선 요구, 대한조선공사 노동자의 노조 민주화 투쟁과 임금 인상 투쟁은 노동자 대투쟁의 전초전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경과]

부산 지역 노동자들의 투쟁은 7월 23일 태광산업 노동자 투쟁에서 시작되어, 9월 14일 풍영, 국제상사, 부영, 삼화고무, 화성, 대양고무 등 6개 회사 18명 노동자의 부산 가톨릭 센터 농성에 이르기까지, 총 363건의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모직이나 봉제 등 섬유 노동자 투쟁 31건, 조선과 일반 금속 등 금속 노동자 투쟁 57건, 신발과 일반 화학 등 화학 노동자 투쟁 43건, 택시와 버스 화물 노동자 투쟁 155건, 전기전자 등 56건, 항운과 관광 출판 등 21건 등의 노동자 투쟁에서 알 수 있듯이 부산지역의 노동자 대투쟁은 전 산업·업종을 망라한, 최대 규모의 노동 쟁의였다.

사업장 규모가 클수록 분규 발생 빈도가 높았고, 1,000명 이상 사업장의 발생 빈도는 65.9%에 이를 정도였다. 대기업이 쟁의를 주도하면서 인근 업체나 관련 업종으로 파급되었고, 타 업체의 분규 타결 내용에 중요한 영향을 주는 양상이었다. 또한 1주일 이상의 투쟁을 전개한 업체가 43.7%[전국 36.9%]를 차지하고 있는 데서도, 부산 지역 노동자 투쟁의 치열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는 금속 사업장과 남성 노동자들이 투쟁을 주도하면서 장기적이고 완강한 투쟁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결과]

부산 지역의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어용 노조의 민주화와 신규 노조 건설로 이어졌다. 이에 1987년 9월 15개 노조가 건설되고, 10월에 7개 노조가 건설되었다. 신규 노조 건설은 어용 노조의 민주화 함께 1988년 ‘부산지역노동조합연합회’라는 지역 연대 조직 건설로 나타났다.

이러한 연대 활동 속에 금속 사업장과 화학, 병원, 사무직 노조 등 전체 업종을 포괄한 조직으로 연대가 확대되면서 1989년 ‘부산지역노동조합총연합’으로 발전하였고, 1989년 1월 22일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건설로 이어졌다. 또한 이 시기 노동자들의 투쟁은 열악한 노동 환경 개선과 임금 인상 등 노동자 처우를 개선하는 성과를 냈지만 회사 측의 탄압도 심해져, 노동 운동 탄압 규탄과 이를 위한 연대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500여 명이 넘는 노동자가 구속되었고, 10월 15일 경상남도 창원의 (주)통일과 부산 지역의 국제상사, 풍영, 삼화, 대양의 해고 노동자 23명은 군부 독재 퇴진을 요구하며 서울 국민운동본부에서 농성을 하는 등의 방법으로 기업과 지역을 넘어 전국적인 조직 활동을 만들고 있었다.

부산에서는 1987년 11월 13일 7월·8월·9월 대투쟁 속에서 배출된 해고자 등 선진노동자들의 지역 활동가 조직인 부산노동자협의회가 건설되었다. 이는 단위 기업에서는 하기 힘든 노조 간부 교육이나 법률 상담, 노조 활동에 관한 교육을 담당하고, 지역 연대 조직을 모색해 나가는 활동이었다. 공장의 울타리를 넘어 자본가와 독재 정권의 탄압을 뚫고 전진하는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의의와 평가]

부산 지역의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초기부터 노동조합 건설이라는 자주적 조직에 대한 요구를 제기하였고, 이는 투쟁의 성과 속에서 노동조합 조직의 건설로 이어졌다. 이렇게 건설된 노동조합 조직은 이전까지의 정부 주도식 노동조합 활동과는 달리 새로운 노동 운동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바로 민주 노조 운동의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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