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0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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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精密勞動者鬪爭 |
영어의미역 | Labor’s Struggle at Saeshin Precision Co., Ltd. |
분야 |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북구 삼락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노재열 |
[정의]
1987년 부산광역시 북구 삼락동에 있는 세신정밀에서 전개된 노동자 투쟁.
[역사적 배경]
세신정밀은 노동자 수 600여 명의 스테인리스 식기 제조 업체이다. 세신정밀의 공장은 부산과 양산, 창원 등 3군데에 있었는데, 이 가운데 부산 공장의 노동 조건이 가장 열악하였다. 1985년 세신정밀에서는 학력을 낮추어 취업한 위장 취업자의 해고 문제로 반대 투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세신정밀 부산 공장에서는 종종 부서별로 일상적인 생존권 투쟁이 일어났으나,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못하고 노동자들의 불만만 거세어 갔다. 1987년 6월 항쟁의 승리는 현장 노동자들의 불만을 더욱 고조시키며 투쟁의 시기를 예고하고 있었다.
[경과]
1987년 7월 23일 세신정밀에서는 어용 노조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유인물이 배포되었다. 그리고 27일 12시경 ‘우리의 요구 및 주장’이라는 벽보가 식당에 부착되고 운동장에서 농성 투쟁이 시작되면서 세신정밀 노동자 투쟁이 전개되었다. 운동장에 집결한 400여 명의 세신정밀 노동자들은 각 부서별 대표자로 지도부를 선출하고 사장과 면담을 요구하는 한편, 면담이 거부되자 ‘임시 총회 소집 요구 서명’을 전개하여 285명의 서명을 받아냈다.
이를 기반으로 이들은 작업을 일체 거부하고 철야 농성을 하기로 결의하였는데, 이러한 농성 노동자들의 단결 투쟁에는 놀랍게도 어용 노조의 일부 간부들까지 서명을 하고 동참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회사 측은 28일 급식과 급수를 중단하고 2일간 휴업을 공고했으며, 농성 노동자들은 노조 위원장 탄핵을 결의하고 임시 집행부를 구성하여 맞대응하였다. 그러자 회사 측은 창원과 양산 공장의 관리자들을 동원하고 전경을 배치하는 등의 방식으로 농성 노동자들을 위협하였다.
29일 농성 노동자들은 자위대를 구성하고 철야 농성을 이어가는 한편 ‘우리의 요구 및 주장의 관철을 다짐하면서-세신정밀 노동자의 철야 농성 3일째에’라는 유인물을 배포하며 투쟁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기존의 어용 노조 집행부와 공동으로 교섭 단체를 구성하려는 노력이 결렬되면서 한때 농성 대오가 흔들리기도 하고, 전기마저 끊어진 30일 이후 빵과 우유로 연명하는 장기 농성의 한계가 점차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이 틈을 노린 회사 측의 흑색선전이 강화될 즈음인 31일 농성 노동자들은 『세신 소식지』를 창간하여 회사 측의 선전을 반박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드디어 어용 노조 측이 노조 위원장 탄핵을 전제 조건으로 하는 공동 교섭단 구성이라는 농성단의 제의를 받아들여, 노조 측 3인과 농성 노동자 3인으로 공동 교섭 대표단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8월 1일 노조 측과 회사 측의 일방적인 합의가 발표되었다. 이에 농성 노동자들은 강력하게 반발하였지만 농성 해제 후 지체 없이 임시 총회를 소집한다는 노사 합의 사항을 수락하여, 부서별로 ‘노동조합정상화추진위원회’를 발족하면서 농성을 해제하였다.
[결과]
농성 해제 후인 8월 4일부터 26일까지 노조정상화추진위원회는 노조 위원장을 탄핵하고 회사 측과의 재협상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상여금 400%, 임금 10% 인상, 가족 수당 3만원 지급 등을 쟁취하고 노조의 민주화를 이루어냈다.
[의의와 평가]
세신정밀 노동자 투쟁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역동적인 분위기와 함께 현장 활동가들이 조직적으로 준비한 투쟁이었다. 그 결과 어용 노조의 민주화에 성공한 초기 사례로서, 이후 부산 지역 노동자들이 투쟁을 더욱 고무한 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