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0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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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六月民主抗爭 |
영어의미역 | June Democratization Movement |
이칭/별칭 | 6월 항쟁,유월 항쟁 |
분야 |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고호석 |
[정의]
1987년 6월 민주 정부 수립을 위해 부산 지역을 비롯한 전국에서 전개된 범국민적 항쟁.
[역사적 배경]
박정희(朴正熙) 유신 정권이 1979년의 부마 항쟁과 10·26 사건으로 막을 내린 후 대다수 국민들은 민주화를 간절히 갈망했지만, 전두환(全斗煥)을 위시한 신군부 세력에 의한 12·12 쿠데타와 5·17 쿠데타, 그리고 1980년 5·18 항쟁의 유혈 진압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유신 시대와 다를 바 없는 체육관 선거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정권은 언론 통폐합과 대대적인 공안 탄압 등으로 국민을 억압하면서 이철희·장영자 사건이나 명성그룹 사건 등 권력형 비리를 저질렀다.
반(反)민주적이고 반민중적인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KBS 시청료 거부 운동, 신민당 개헌 현판식 집회 등에서 폭발적으로 나타났고, 1986년 권인숙 성 고문 사건, 보도 지침 사건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하였다. 특히 1979년 부마 항쟁의 진원지였던 부산은 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살아 있는 곳으로서, 민주 항쟁의 잠재력이 다른 어떤 지역보다 큰 곳이었다.
[경과]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朴鍾哲)이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한 것은 6월 민주 항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월 28일 서울에서 발족한 ‘박종철 국민추도회준비위원회’[약칭 ‘국민추도위’]의 주도로 전국 주요 도시에서 2·7 추도 대회와 3·3 평화 대행진이 전개되면서 항쟁의 대열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박종철의 고향인 부산에서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약칭 ‘부민협’]가 주도하는 2·7 추도 대회와 3·3 평화 대행진에 만 명이 넘는 시민이 참여하였고,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고문을 규탄하는 활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에 폭발력을 배가시킨 것은 4월 13일 전두환의 호헌 발표였다. 유신 헌법 이후 무려 17년 동안 빼앗긴 대통령 선거권을 되찾고자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뜻을 깡그리 무시한 이 발표로, 항쟁은 순식간에 정권 퇴진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호헌에 반대하는 각계의 성명과 항의 농성, 삭발과 단식 및 기도회가 이어졌다. 5월 17일 부산에서는 젊은 노동자 황보영국이 “광주 학살의 책임 규명”과 “호헌 철폐”를 외치며 분신자살하여 정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무렵 부산의 대학가는 3월부터 시작된 학원 민주화 투쟁의 성과가 6월 민주 항쟁으로 이어졌다. 특히 6월 5일 결성된 ‘부산지역총학생회협의회’[약칭 ‘부총협’]를 기반으로 부산의 청년 학생들은 6월 민주 항쟁에 조직적으로 참가하여 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5월 18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경찰의 은폐와 조작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폭로되면서 극에 달한 국민적 분노는 대통령 직선제 요구와 상승 작용을 일으키며 분노의 격류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여론을 효과적으로 수렴하고 이후의 정세를 주도할 지도부의 필요성이 강력하게 대두했고, 이 흐름을 앞장서서 선도한 것이 부산의 민주 세력이었다.
부산에서는 5월 20일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중심으로 양심적 종교계, 학생, 노동자, 재야 민주 세력, 야당 정치인이 모여 ‘호헌반대 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 부산본부’[약칭 ‘국민운동 부산본부’ 또는 ‘부산국본’]를 결성하였다. 이로써 부산은 5월 27일 서울에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약칭 ‘국민운동본부’ 또는 ‘국본’]를 결성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라는 지휘부가 항쟁의 방향을 이끌게 되면서 이제 항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부산의 6월 민주 항쟁은 호헌반대 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 부산본부의 주도 하에 진행되었다.
6월 10일 ‘고문 살인 은폐 조작 규탄 및 민주 헌법 쟁취 범국민 대회’[약칭 ‘6·10국민 대회’]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주도한 전국 규모의 첫 국민 대회였다. 이 날 6·10 국민 대회에는 서울과 부산을 비롯한 전국 22개 도시에서 24만 명이 참여하여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6월 민주 항쟁의 대장정이 시작된 것이었다. 동시에 이 날은 서울 잠실 체육관에서 노태우(盧泰愚)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민정당 전당 대회가 열리는 날이었지만, 전혀 국민적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이후 6월 29일까지 전국에서 500만 명, 부산에서만 30만 명 이상이 참가하는 시민항쟁이 전개되었다. 이 기간 동안 부산에서는 25일 단 하루를 제외하고 시위가 벌어지지 않는 날이 없었다. 시청과 도심을 무대로 날마다 벌어지는 거리 시위는 장마철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도 어김없이 계속되었고 대부분의 시위는 새벽녘까지 이어졌다. 고문 경찰에 대한 분노는 파출소 파괴로 나타나 보수, 부평, 동대신3동, 영주파출소 등 다수의 파출소가 시위대의 습격을 받아 파괴되었다.
시위가 여러 날 계속되면서 효과적인 시위 방법이 개발되곤 했는데, 경찰이 몰려오면 시민 사이에 섞이고 경찰이 물러가면 다시 나와 시위하는 일명 ‘도깨비 작전’, 시내 각처로 흩어져 벌이는 동시 다발적 소규모 시위를 구사하며 하루 종일 경찰을 허탕 치게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대머리인 전두환을 빚대어 ‘새 나라의 어린이’를 개사한 “새 나라의 대통령은 대머리가 아닙니다. 대머리가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를 부르며 서로를 고무시켰다. 가두시위에 대한 시민들의 지원도 적극적이어서 ‘호헌반대 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 부산본부’에는 시민 성금이 답지하였고, 택시와 버스 기사들의 차량 경적 시위는 대유행을 이루었다. 이러한 항쟁 소식은 『민주 부산』, 『민주 시민』, 『절규』 등 항쟁 소식지를 타고 지역민에게 공유되어 6월 민주 항쟁의 파장을 더욱 확산시켰다.
서울의 명동성당 농성이 종료된 16일 부산에서는 시위가 다시 치열해지면서 부산 지역 6월 민주 항쟁의 또 하나의 특징을 이룬 가톨릭 센터 농성이 시작되었다. 이후 22일까지 계속된 가톨릭 센터 농성에는 시민들의 지원과 위로가 러시를 이루었다. 김밥과 음료, 성금은 물론 격려의 편지가 쇄도하였던 것이다. 계엄령이 임박했다는 소문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항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17일 전후에도 부산에서는 흔들림 없이 농성과 대규모 시위가 계속되면서, 마침내 6월 민주 항쟁의 전환점이 된 18일 부산에서는 투쟁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하였다.
6월 18일은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선포한 최루탄 추방의 날이었다. 하지만 이날도 경찰은 어김없이 최루탄과 곤봉으로 폭력 진압을 자행했고, 결국 이태춘이라는 또 한 명의 청년이 최루탄에 희생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불어난 시위 행렬이 8만 명을 헤아리며 양정과 서면, 좌천동과 남포동 일대를 뒤덮었을 때 드디어 경찰은 진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의 광경을 일본 『아사히 신문』은 “부산이 해방구처럼 되었다”라고 표현하였다. 18일 부산의 시위는 6월 민주 항쟁의 분수령을 이룬 것이었다. 26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이끄는 ‘평화 대행진’에는 전국 38개 시, 군에서 100만 명이 시위에 참여하여 6월 민주 항쟁 중 최대 규모의 시위가 벌어졌다. 부산에서는 신부와 수녀 400명이 이끄는 1만 5000명의 시민들이 평화 행진을 벌였다. 그 결과 마침내 5공 정권으로부터 6·29 선언을 이끌어냈다.
[결과]
시위의 규모와 격렬함, 지속성 등에 놀란 전두환 정권은 계엄령 선포 등을 검토했으나 결국 국민들의 분노를 적절한 선에서 무마하는 ‘6·29 선언’을 발표하였다. 민정당의 새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발표한 9개 항의 이 선언에는 대통령 직선제 실시, 양심수 석방, 김대중(金大中) 복권, 대폭적인 민주화 조치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시위는 진정 국면에 들어갔다. 그러나 노동자와 농민 문제, 5·18 항쟁의 진상 규명에 대한 언급이 없고 선언의 내용이 지나치게 모호하여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하다는 등의 문제점으로 인해 ‘6·29 선언’은 처음부터 기만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었고, 이 때문에 ‘육이구’가 아니라 ‘속이구’라 불리기도 하였다.
한편 6월 민주 항쟁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고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6월 17일 무렵부터 부산 지역에서는 노동자들의 항쟁 참여가 눈에 띄게 늘어났는데, 18일 시위에는 사상 일대 노동자들이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6월 민주 항쟁은 공단 지역을 중심으로 9월까지 노동자들의 대규모 권익 쟁취 투쟁으로 이어졌다.
[의의와 평가]
6월 민주 항쟁으로 짧게는 7년간의 전두환 정권, 길게는 26년간 지속되었던 군부통치가 끝나고 민간 정부로의 이행이 가시화되었다. 비록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어 다수 국민들이 바라던 정권 교체를 이루지 못했지만, 이후 민주적 기본권이 대폭 신장되고 사회 운동, 특히 시민운동과 노동 운동의 비약적 활성화를 이루어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부산에서도 환경 운동, 노동 운동 등이 급속히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