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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센터 농성 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162
한자 -籠城事件
영어의미역 Uprising at the Catholic Center
분야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중구로 71[대청동 4가 81-1]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고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주화 운동|농성
관련인물/단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부산 가톨릭 센터
발생|시작 시기/일시 1987년 6월 16일연표보기 - 부산 가톨릭 센터에서 전두환 독재 정권의 퇴진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농성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87년 6월 22일연표보기 - 가톨릭 센터 농성 해산
발단 시기/일시 1987년 6월 10일 -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주도로 6·10 박종철 군 고문 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 대회 개최
발단 시기/일시 1987년 6월 8~13일 - 천주교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주최하는 ‘5·18 민중 항쟁 전시회’ 개최
발단 시기/일시 1987년 6월 15일 - 서울 명동성당 농성 해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7년 6월 22일 - 귀가하던 농성단 침탈 폭행 사건 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7년 6월 23일 - 카톨릭센터에서 다시 농성 시작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7년 6월 26일, 28일 - 대청동 중앙성당에서 미사를 본 후 가두시위 전개
발생|시작 장소 가톨릭 센터 -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 4가 81-1지도보기
종결 장소 가톨릭 센터 -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 4가 81-1지도보기

[정의]

1987년 6월 민주 항쟁 중 6월 16일부터 22일까지 부산 가톨릭 센터에서 민주개혁을 요구하며 시민·학생 350여 명이 벌인 농성.

[역사적 배경]

1987년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주도로 열린 ‘6·10 박종철 군 고문 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 대회’[약칭 6·10 국민 대회] 이후 부산과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에서 연일 가두시위를 중심으로 하는 민주 항쟁이 전개되었다. 이런 가운데 항쟁 지도부 가운데 일부가 농성을 벌이는 서울 명동성당은 항쟁의 구심점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15일 명동성당 농성이 해산되면서 항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드는 조짐을 보였다. 이에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약칭 국민운동 부산본부]에서는 항쟁의 불씨를 이어가기 위한 새로운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경과]

6·10 국민 대회 이후 부산에서는 매일같이 가두시위가 전개되었다. 1987년 6월 16일 저녁 무렵, 이날도 부산직할시 중구 대청동의 부산 가톨릭 센터 앞에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시민과 학생들로 구성된 일단의 시위대가 가두시위를 벌이며 전투 경찰과 밀고 당기는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날 경찰은 유난히 집요하게 시위대를 밀어붙였는데, 그 시위대 속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의 핵심 지도부가 섞여 있었다. 전경들에 둘러싸여 고립된 상태에서 공방전을 벌이던 이들은 전투 경찰의 최루탄 세례와 폭력 진압에 밀리게 되자, 부산 가톨릭 센터 쪽의 양해를 구하고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특히 가톨릭 센터는 1987년 6월 8~13일 천주교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주최하는 ‘5·18 민중 항쟁 전시회’가 개최된 곳이었다. 이 전시는 연인원 6만 명이 관람하였던 바, 그간 5·18 항쟁의 진상을 알지 못했던 부산 시민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면서 부산의 6월 민주 항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이들은 22일까지 6박 7일 동안 가톨릭 센터에서 전두환(全斗煥) 독재 정권의 퇴진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농성을 전개하였다. 350여 명에 이르는 농성단은 3개 조로 나뉘어 역할을 분담하고 체계적인 농성을 전개하였다. 17일 아침 이들은 4개 항의 ‘투쟁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와 투쟁 일정표를 내다붙이고, ‘애국 시민들께 드리는 글’이라는 성명서를 만들어 옥상에서 뿌렸다.

가톨릭 센터 농성은 명동성당 농성을 잇는 항쟁의 구심점으로 떠오른 데다, 항쟁의 열기가 가장 드높았던 부산에서 전개되어 세계적인 주목을 끌었다. 17일에 열린 내외신 기자 회견에는 로이터, AP, AFP 등 대표적인 통신사들과 뉴욕타임즈, 아사히신문, NHK 등 세계적인 언론사 기자들을 포함한 100여 명의 기자들이 취재 경쟁을 벌였고, 농성 기간 내내 이 소식은 세계 주요 언론들의 중요 기사로 보도되었다.

가톨릭 센터 농성에 대한 천주교회와 국제 시장 상인들을 비롯한 부산 시민들의 지지 열기도 매우 높았다. 17일 아침부터 김밥, 주먹밥 등의 음식뿐만 아니라 치약, 랩, 물안경 등의 시위 용품과 지지와 성원을 보내는 편지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양의 지원 물품이 연일 밀려들었다. 여기에는 시장 상인을 비롯한 일반 시민과 시위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고등학생, 심지어 시위 진압에 동원된 전투 경찰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성금과 편지 등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계엄령이 발표되고 공수부대가 투입될 것이라는 소문이 위기의식을 자아내는 속에서 가톨릭 센터를 빠져나가는 농성자가 생겨나는가 하면, 경찰의 공작이 효과를 거두어 다소간 내부 분열이 조장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가톨릭 센터 농성은 부산 지역 6월 민주 항쟁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농성이 시작된 16일 이후 시위가 벌어지는 부산 시내 곳곳에서 ‘가톨릭 센터로 가자!’는 구호가 빈번하게 터져 나와, 가톨릭 센터 농성이 투쟁 의지를 드높이는 촉매제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농성자들도 가톨릭 센터 옥상에서 유인물을 살포하고 구호를 외치는 일을 계속하는 한편, 시위대가 몰려오면 문을 열고 나가 가두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부산 지역 6월 민주 항쟁 중 최대 인원이 가두시위에 참여했던 18일에는 도심을 향하는 수 만 명의 시위대가 가톨릭 센터 앞을 지나 투쟁 의지를 다지기도 하였다.

이런 가운데 21일 오후 경찰의 최후통첩이 농성단에 전달되었다. ‘22일 안으로 해산하면 안전 귀가를 보장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강제 해산, 전원 구속 시키겠다’라는 것이었다. 농성자들도 장기간의 농성에 지쳐가고 있었고, 한편으로 농성이 장기화되는 데 따른 가톨릭 센터 쪽의 부담도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이에 21일 저녁부터 이튿날까지 논의를 진행한 끝에, 두 차례의 찬반 투표를 거쳐 해산을 결정하였다.

[결과]

6월 22일 농성단은 경찰의 안전귀가 보장 약속을 받고 6박 7일 간의 농성을 해산하고 3대의 버스에 분승하여 귀가하였다. 그런데 이 가운데 해운대 방향으로 가던 버스가 10시 30분 경 남부경찰서 앞에서 경찰에 폭행을 당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경찰은 귀가 버스를 강제로 세운 뒤 차내에 최루탄을 터뜨리고, 귀가 농성자와 동승한 신부들에게까지 무차별적인 보복성 폭행을 가하여, 17명이 메리놀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에 격분한 천주교 부산교구 소속 신부 80명 전원이 이튿날부터 가톨릭 센터에서 다시 항의 농성에 돌입했고, 26일과 28일에는 부산직할시 중구 대청동 중앙성당에서 미사를 드린 후 가두시위에 나섰다. 이는 시내 중심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다시 촉발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농성단의 주축을 이루었던 대학생들이 다시 시위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

가톨릭 센터 농성은 다양한 성격을 가진 집단이 대규모로 모여 비계획적으로 벌인 농성으로서는 기간이나 진행 과정의 체계성으로 볼 때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이로써 가톨릭 센터 농성은 부산의 6월 항쟁이 광범위한 시민들이 참여하는 시민 항쟁으로 지속되는 데 구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귀가 버스 침탈 사건으로 6월 민주 항쟁 막바지에 벌어져 시민의 항쟁 의지를 높이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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